민변 농성장에서 어깨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날치기 국회를 규탄하는 시국선언에 서명하면서, 그리고 범대위 모임에 참석해 긴박한 난국 타개책을 논의하면서, 우리는 지금 어느 시대, 어느 정권 하에 살고 있는지 헷갈리기도 했다.87년의 그 처절했던 6월항쟁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것은 나 혼자만의 심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놓은 이 정부가 우리를 그처럼 혼란에 빠뜨린 것이다.
이 정부의 성적표는 한국 축구에 비유할 수 있다. 전반전은 그런대로 잘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후반전으로 넘어오면서 그만 졸전에 빠져버렸다. 그냥 졸전이 아니라 고의반칙이 심해(이 점은 한국 축구와 다르다) 퇴장명령감이 되었다.
그 후반전의 한 복판에서 12·26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처리가 감행되었다. 상대팀 선수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새벽에 여당의원 끼리만 떼지어 그라운드에 나와 공을 차 넣은 셈이다. 그리고서 이겼노라고 우겨댔다. 예전엔 여당의원을 거수기라고 했는데 이제는 거수기도 못된다. 일어났다 앉았다 했을뿐 손 한 번 들어보지 못했으니 「기립착석기」로 전락한 것이다.
생각컨대 여당의원들만의 12·26 날치기처리는 이 정부의 실체를 보여준 이벤트였다. 각계의 질타와 집회·시위에 밀려 여야영수회담이 열렸고 김영삼 대통령은 노동법·안기부법의 「국회 재론」과 민주노총지도부에 대한 영장집행 보류 등을 밝히기는 했으나 정국과 노동계의 위기상황이 쉽사리 수습될 것 같지는 않다.
날치기에서 청와대 여야회담까지를 지켜본 심정은 착잡하다. 대통령이나 여권 핵심은 지난번 날치기를 반성하는 기색이 없다. 재야출신도 대권주자도 누구 한 사람 날치기를 만류하거나 거부한 사람은 없었다. 여권은 종교계 학계 법조계 등의 항의성명과 시위에도 막무가내였고 야당의 영수회담 제의도 일축했다. 그것이 김대통령 특유의 밀어붙이기식 정면돌파라고 했다.
야당영수를 만난 자리에서도 김대통령은 날치기처리의 원천무효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헌법절차에 의해서 공포하였으니 재개정 아닌 재심의가 「위헌」이라고 했다. 정부여당은 이번 전국민적 저항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저항의 직접적 발단이야 신한국당의 날치기 법안처리에서 비롯됐지만 잠재적인 원인은 정부의 독선과 오만·실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개혁의 실종, 대북정책의 무원칙, 경제정책의 실패, 지역차별의 극대화 등에 대해서 실망했다. 김대통령의 인사는 PK(부산·경남) 일색으로 편중됐다. 검찰 경찰 정보기관의 인사 때마다 PK가 아니면 요직에서 배제되었다. 그런 점이 민심이반의 요인으로 누적되어 저항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날치기처리는 적법일 수가 없다. 그것이 적법이라면 헌법도 국회법도 야당도 무용지물이다. 물론 날치기 법안의 무효화를 자인하고 법안을 재심의하자면 여권으로서는 당장은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오명을 씻을 바에는 깨끗이 씻는게 좋고 그것이 김대통령의 명예회복을 위한 최선의 길이자 나라의 입헌주의와 국민의 소망을 존중하는 길일 것이다.
그리고 이번 날치기 사태에 대해서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 김대통령이 퇴진은 아니 하더라도 최소한 대국민 사과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신한국당 대표와 여권 강경파로 사태를 주도한 사람들이 물러나야 한다. 유시유종이라 했는데, 끝이 있음을 아는 것은 처세로서나 도리로서나 매우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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