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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북 최고화가 한상익 첫 화집 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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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북 최고화가 한상익 첫 화집 입수

입력
1997.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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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는 이데올로기도 분단도 없었다/화집으로 꽃피운 남북 ‘반세기 우정’/김흥수·권옥연 화백 중서 선배 상봉/도록 제작이어 서울전시도 추진함남출신인 김흥수(78) 권옥연(74) 화백이 최근 북한에 있는 고향선배 원로작가인 한상익(80) 화백의 생애 첫 화집을 일본에서 출간, 북으로 보냈다. 두사람은 95년 12월 한씨가 전시회를 열고 있는 중국 옌지(연길)로 달려가 50년만에 감격적으로 만난 자리에서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김씨의 함흥고보, 도쿄(동경)미술학교 2년선배인 한씨는 광복후 북한의 화단을 이끌어온 대표적인 유화창작가. 북한에서 최고의 작가로 자리를 굳힌 노화백의 평생 소망이 남쪽후배들의 정성을 통해 이루어진 셈이다.

남쪽의 두화백이 한씨의 생존소식을 접한 것은 95년 11월말께. 서울 보성학교(현 보성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다가 광복직후 귀향한 그와 고향에서 헤어진지 정확히 반세기 만이었다. 한씨는 후배 김씨가 45년 월남하면서 동행을 권유했지만 부친이 고령이라는 이유로 고향에 눌러앉았다. 김, 권씨는 95년말 한씨가 중국 옌지예술학교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북한인접촉신고서를 내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평양출신의 원로사진작가 문선호(74)씨도 같이 갔다.

한씨의 개인전이 열린 그해 12월2일 남과 북을 대표하는 세 화백은 주름진 얼굴을 맞대며 엉엉 울었다. 특히 고교시절부터 미술반 선배이던 한씨를 따랐던 김씨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고 한동안 떨어질 줄 몰랐다. 권씨가 「가고파」를 열창하자 전시장이 눈물바다가 됐다.

후배들이 한국현대미술 대표작가 100인 선집을 건네주자 한씨는 눈물을 머금고 『내 일생 이런 책을 만들면 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세사람은 즉시 도록제작작업에 착수했다. 54년 그린 「평북 산드리의 봄」부터 87년작 「왕찔레꽃」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풍경화와 정물화인 대표작 70여점을 숙소로 옮겨 35㎜휴대용카메라로 밤새 촬영했다.

그의 작품을 한점씩 사온 세사람은 귀국 후 일본의 미술서적출판사인 「미술세계」와 접촉, 지난해 5월 화집 500부를 찍었다. 경비 1,500여만원은 세사람이 분담했다. 그러나 북한무장공비침투사건 등으로 남북관계가 악화, 전달하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일본의 「미술세계」 사장을 통해 30여부를 보냈다. 남쪽의 세 원로작가는 『그동안 괜스레 빚진 마음을 떨치지 못했는데 이제야 조금 홀가분하다』고 입을 모았다. 세사람은 꿈에도 그리던 화집을 받아보고 기뻐했을 선배를 위해 또하나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옌지에서 헤어지면서 그에게 제의한 서울전시를 구체적으로 추진하는 일이다. 김씨는 『당시 한선배의 작품을 판문점을 통해 들여와 정식으로 전시회를 열고싶다고 하자 북측 지도원이 검토해보겠다고 했었다』며 『남북문화교류차원에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상익 삶과 예술/일제때 동경유학 엘리트 미술가/한때 반동 몰려 벽돌공 시련도/북 절경·도시풍경 묘사 탁월

한상익 화백은 광복이후 북한화단을 지켜온 산증인이며 사회주의리얼리즘과 인상파기법을 결합해 새로운 화풍을 개척, 북에서 첫 손가락으로 꼽는 서양화가이다. 1917년 함남 함주군 주서리에서 태어난 한씨는 함흥고보를 거쳐 37년 미술학도의 꿈이었던 도쿄(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함으로써 「엘리트미술가」의 길을 걸었다. 북한의 현대미술을 주도했던 정관철 정보영 김학원 등 3명이 그의 동기생이다. 김흥수씨는 「가난했지만 여유있고 강단있는 선배」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물감자국으로 얼룩진 옷한벌로 사계절을 지내 학생들이 「우에노의 거지」라고 불렀지만 성격이 쾌활해 주변에 친구가 많았다. 그는 3학년때 머리가 길다고 뺨을 때리는 교련교관을 폭행, 퇴학당했다.

43년 귀국한 한씨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부엌에서」가 특선을 차지, 두각을 나타냈다. 45년말 고향으로 돌아가 50년부터 5년간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냈으나 특정인의 초상화나 기록화제작을 거부하다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대학동기로 미술가협회 위원장인 정관철이 사망한 후에는 반동으로 몰려 원산벽돌공장으로 쫓겨났다. 그후 복권돼 미술가동맹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북한의 국가미술전람회와 모스크바에서 열린 사회주의국가미술전람회에 출품, 호평을 받았다. 85년에는 일본에서 금강산풍경화 75점을 전시,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 화단의 관심을 끌었다.

한씨의 작품은 몇점의 정물화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북한지역의 절경과 도시풍경을 담고 있다. 엄격한 구도위에 붓을 재빨리 움직여가며 날렵하게 구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김흥수씨는 『한선배는 사물의 껍데기만을 묘사하는 사회주의리얼리즘에서 벗어나 모든 소재를 자신의 감정으로 한번 걸러내 표현하고 있다』며 『남쪽에서 작품활동을 했다면 타고난 색채감각과 세련된 필치가 더욱 화려하게 꽃피었을 것』이라고 아쉬워 했다. 북한은 76년부터 한씨의 생계와 작품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연주담」 「송도원」 「만물상」 「망향대」 등 20여점의 작품은 국가보존작품으로 지정돼 미술박물관에 보관돼 있다.<최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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