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낙원’ 찾아온 3만6,000명의 교민들/경쟁도 스트레스도 적은 조용하고 여유로운 삶/다만 일자리가 문제/의사·박사도 취업 힘들고 대부분 자영업이나 노무직/그러나 수입·신분차별 없기에 체면만 포기하면 살만하다고『호주에서 살려면 넥타이를 풀어라』 호주 시드니에서 만난 한국 교민들은 『바닥부터 기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는 정착이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말 현재 호주 교민은 3만6,000여명. 이중 약 3만명이 시드니에 몰려 있다. 한국인의 호주 이민은 70년대 초반 호주정부의 백호주의 포기와 함께 베트남 파견 기술자를 중심으로 시작됐지만 그 수가 크게 는 것은 80년대 중반부터. 먹는 문제를 해결한 고학력, 화이트칼라 계층이 「삶의 질」을 찾아 대거 호주로 몰려 들었다. 연령층도 30대 비율이 높아지는 등 젊어졌다. 이민 목적은 대개 『각박한 경쟁사회에서 탈출해 보다 조용하고 여유있는 생활을 즐기고 싶어서』이다.
실제로 호주는 뉴질랜드와 함께 지구상의 「마지막 낙원」으로 불릴 만큼 훌륭한 사회·환경 여건을 갖추고 있다. 세계 최고수준의 사회보장 제도에 학비는 시민권자의 경우 대학까지 전액 무료나 마찬가지다. 교민들은 『과외비나 촌지문제 등 자녀교육 관련 스트레스에서 완전히 해방됐다』고 말한다. 또 주 5일, 하루 8시간 근무가 철칙이어서 여가가 충분하고 인종차별이나 범죄문제가 구미의 어느나라보다도 심각하지 않다는 게 교민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호주 국영방송 SBS에서 한국어 방송을 담당하고 있는 주양중(36) 기자는 『호주는 성실히 일하면 삶을 보장해 주는 나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민들의 현지 정착은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자리를 찾는 것이 난제. 한국에서 나름대로의 사회적 지위를 누리던 사람들이 호주에서 걸맞는 직업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우선 호주는 인구가 우리나라의 40% 수준인 1,800만명에 불과하고 산업규모도 작아 고용시장이 협소한 편이다. 이 때문에 문화적으로 이질적이고 언어 능력이 떨어지는 교민들이 현지에서 화이트칼라로 일하기는 어렵다. 교민들이 상업 요식업 숙박업 부동산소개업과 건물청소 등 노무직에 주로 종사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재리(50) 시드니 한인회장은 『교민들 가운데는 학벌이 아까운 사람이 너무 많다』면서 『한인들의 호주사회 중심권 진입은 이민 2, 3세대에 가서야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역시 81년 호주에서 유학한 뒤 정착한 이학박사로 지금은 간이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대 천문학과를 나와 92년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기술이민을 온 안모(42)씨는 컴퓨터업체에서 과장급 매니저로 일하다 3년만에 그만두고 교민 6명과 스웨덴제 고급가구 배달업을 시작했다. 영어가 서툴다는 이유로 사장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참을 수 없었다.
이민 8년째인 투자이민자 김모(56)씨도 국내에서 대형 유통업체 중역을 지냈으나 호주에서는 몇개월간 현지 기업의 기술고문으로 일한 것이 직장생활의 전부다. 그의 부인은 봉제공장에 다니고 있다.
시드니의 한인밀집지역인 캠시에서 사무실을 연 박은덕(34·여) 변호사는 『남편의 장기실업과 직장적응 실패에서 기인한 한인가정내 폭력과 이혼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교민과 결혼해 이민 온 남편들이 직업을 못찾아 가정불화가 생기는 경우도 많다』고 덧붙였다.
교민들은 호주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집착과 체면 등 한국적 사고방식을 벗어 던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면 생활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것은 물론 얼마간의 경제적 성공도 기약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70년대 이민 온 한국인 중에서 중개무역으로 성공한 송용등(55) 로바나무역 대표 등 실업가들은 모두 청소부에서 시작한 사람들이다.
시드니의 번화가 킹스크로스에서 대형 음식점을 운영하는 김광일(36)씨는 『삶의 질은 공짜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며 『호주는 수입과 사회적 인식면에서 사무직과 노무직의 차이가 거의 없는 나라인 만큼 한국생활에 연연하지 말고 빨리 할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한국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열고 있다가 87년 투자이민을 온 최모(55)씨는 1년을 그냥 놀다가 현재 시드니의 한인 부동산 중개업소에 나가고 있다. 호주에서는 외국 의사면허를 인정하지 않아 다시 자격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언어에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그래도 몸과 마음이 편합니다. 한때 심적 갈등도 있었지만 얻은 것이 더 많습니다. 주말에는 꼭 가족여행을 하고 아이들은 어떻게 들어갔는지 모르게 대학에 입학했어요. 여기에는 직업에 대한 편견이 없어 자존심 상할 일도 없습니다』<시드니=유성식 기자>시드니=유성식>
◎“청소원이 맘은 편해요”/기술자 꿈꾸며 온 유학/그러나 언어장벽 못넘고 결국 생계위해 청소일/하지만 절망은 없다/‘조그만 무역상’ 꿈이 있고 가족들과의 평화로운 삶이 있기에
시드니 최대의 프랭클린 쇼핑센터에서 청소일을 하는 한경호(41·가명)씨는 오늘도 변함없이 빨간색 청소복과 모자를 쓰고 매장 바닥을 청소한다. 창피하거나 피곤한 표정은 어디에도 없다. 이민생활 9년동안 생계를 위해 청소일에 매달려 왔지만 후회는 없다. 간섭과 압박, 스트레스가 없어 한국에 있을 때보다 마음은 훨씬 편하다.
한씨가 호주로 이민을 온 것은 32세때인 88년. 서울의 작은 회사에 다니던 그는 답답한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호주 이민을 결심, 미화 1,000달러를 들고 홀로 이국만리로 날아 왔다. 시드니에서 대학을 나와 컴퓨터기술자가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처음 4개월 동안은 적응을 위해 퀸즐랜드 케언스의 큰누나집에 기거하며 아르바이트로 청소일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유명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둘째누나가 돈을 부쳐 주었지만 그는 한사코 받지 않았다.
청소일로 3,000호주달러(약 200만원)를 모은 그는 꿈꿔온 컴퓨터 기술자가 되기 위해 시드니전문대학(UTS)에 입학했다. 학비는 무료였고 매달 100호주달러(약 6만7,000원)의 생활보조금도 나왔다. 틈틈이 아르바이트로 청소일을 하면 1주일에 100호주달러는 벌 수 있어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언어장벽은 높았다. 처음 한학기 동안 강의를 듣거나 책을 보아도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남보다 2, 3배는 더 공부해야 했어요. 영어교재를 3, 4차례씩 읽었죠. 강의를 제대로 못알아 들을 때면 직접 교수를 찾아 가 개인교습까지 받았습니다. 다행히 교수들은 배움을 갈망하는 나이 든 동양학생을 따뜻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6개월이 지나자 강의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용을 알아 듣고 답안작성도 할 수 있게 됐다. 2년동안 청소아르바이트와 공부를 함께 하며 어렵게 공부한 끝에 90년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컴퓨터 하드웨어 회사에 입사원서를 냈지만 인터뷰라는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강의를 듣는 것과 취업 면접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질문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대답도 엉망이 됐다. 결과는 뻔했다. 『높은 언어장벽을 실감해야 했죠. 2년간의 고생이 결국 헛수고로 돌아갔고 컴퓨터기술자의 꿈은 날아가 버렸어요』
그는 결국 생계를 위해 인쇄회사에 입사했다. 그러나 언어때문에 허드렛일밖에 맡을 수가 없었다. 주당 500∼600호주달러를 받았지만 집세와 세금, 자동차월부금 등을 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90년말 한국의 애인과 결혼을 한 후 함께 돌아 왔지만 혼자 벌어서는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았다.
결국 다시 청소일을 시작했다. 몸으로 하는 일이 오히려 벌이가 낫고 세금도 없었다. 아이들 양육과 교육에 돈이 들지 않는 것도 다행이었다. 『청소일이 힘들지는 않아요. 이곳에서는 별로 창피한 일도 아니고요. 다만 재미가 없어요. 새벽 5시부터 아침 8시까지 청소를 끝내고 퇴근한 후 하오 5시부터 하오 9시까지는 격일로 청소를 해요. 쳇바퀴같은 생활이죠』
요즘 그의 꿈은 돈을 모아 조그만 무역상을 차리는 것. 『청소에서 시작해 음식점이나 상점 등을 여는 것이 이민자들의 전형적인 코스입니다』
앞날에 대한 걱정이나 불안은 없다. 꿈이 이뤄질 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어차피 부딪쳐 보는 것이다. 이곳에 살다보면 아무리 급한 사람도 느긋해진다. 혼자 바둥거린다고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청소일 하는 것이 비참하지 않냐구요? 여기서는 그런 생각을 버려야 살 수 있어요. 절망해 본 적은 없어요. 희망은 있지만 치열하게 추구할 만한 것은 아니에요. 작은 꿈을 갖고 가족과 마음 편하게 사는 게 바로 호주에서의 삶이거든요』<시드니=배성규 기자>시드니=배성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