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청와대에서 여야 영수회담이 열린 날 워싱턴의 백악관에서는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됐다.「20세기 마지막 대통령 취임식」으로 두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중에 21세기를 맞이하는 역사적 지도자다. 취임사에서도 그는 『미국은 이제 세번째의 신세기를 맞게 된다』면서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역설했다. 나이 50인 그에게서는 아직도 젊음과 힘이 넘친다. 그를 통해서 보는 미국은 여전히 최강이고, 여전히 신선하다는 느낌이다.
미국 대통령 취임식을 누구보다도 감회깊게 지켜보았을 젊은 지도자 한사람이 대서양 건너 영국에 있다. 토니 블레어 노동당 당수. 오는 5월로 예정된 총선에서 영국 보수당정권 18년을 종식시키고 집권에 성공할 것이 틀림없다고 하는 「새 노동당, 새 영국」의 희망이다. 그의 나이 43세. 그는 한때 『표절했다』는 험담을 들을만큼 클린턴을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클린턴 보다는 더 21세기형에 근접한 정치인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는 잘 생기고 말 잘한다는 점에서 TV형 정치인의 전형이고, 무엇보다도 젊음이 강점이다. 그의 젊음은 2년 전 3월 영국방문 길에서 그를 처음 만난 김영삼 대통령으로 하여금 『30대로 밖에 안보인다. 정말 젊다!』는 찬탄을 하게 만들었다는 삽화를 전한다.
그는 30세에 하원의원 당선으로 정치입문(클린턴은 32세에 주지사 당선), 41세에 노동당 당수 피선(클린턴은 46세에 대통령 당선)을 거쳐 43세인 올해 「대영제국의 환상에서 벗어난 최초의 전후세대 총리」로의 탄생을 눈앞에 두고 있다. 50세로 제2기 대통령에 취임한 클린턴과 함께, 21세기를 여는 세계 지도자의 반열에 그가 서 있음은 지금 의심의 여지가 없다.
블레어가 영국의 희망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러나 그의 젊음 한가지 때문만은 아니다. 「늙은 제국에 필요한 젊음」이 호소력을 지니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정작 그의 최대 강점이자 인기의 비밀은 그가 끊임없이 보여주는 「유연성」에 있다고 한다. 그는 「노조들의 정당」인 노동당에서 노조들의 영향력을 크게 줄였고, 「좌파 사회주의 노선」인 노동당에서 우파 보수색채의 정책깃발을 들었으며, 결과적으로 보수당의 기반인 중산층을 끌어안은데 이어 지난 80년간 등졌던 재계와도 악수함으로써 「영국병의 원인 제공자」로서의 노동당 이미지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고 평가된다. 그가 지난해 10월 노동당전당대회에서 한 개막연설은 『영국에서는 더 이상 「사·노」의 대립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당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다시 갖게 해줘야 한다』는 파격적인 것이다. 그는 지난 8일의 연두회견에서는 『이번 5월의 총선은 리더십과 비전에 관한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자신감을 보였다. 그의 비전은 노동당을 전혀 새로운 21세기형으로 환골탈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총선에서의 예견되는 승리는 그래서 「노동당의 승리」이자 「블레어의 승리」가 될 것이고, 그것은 또한 지구상의 좌파 사민주의 이념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전범이 된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문제는 블레어나 클린턴이 아니다. 지금 여기, 서울의 아슬아슬한 하루하루의 상황이고, 청와대 오찬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의 지도자들이다. 대통령을 포함한 3명의 「김 총재」들과 1명의 「이 대표」의 모습에서 국민은 무엇을 느끼고 어떤 비전을 보는가. 그들에게 희망이 있는가. 그들은 혹시 21세기형 지도자인가.
지난 연말, 12월26일 새벽의 날치기 사태에서 비롯된 「노동법 및 안기부법 개정」파동에서 「얻은 자」는 누구이며 「잃은 자」는 누구인지도 묻자. 가장 깊고 아픈 상처를 입은 사람은, 아마도 집권 당과 행정부를 책임진 대통령이다. 그는 두 개정법의 변칙처리와, 그에 이어진 연두회견에 이르러서도 「밀어 붙이기」와 「강공」만이 사태를 수습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어디에도 「유연성」은 보이지 않았다. 유능제강은 대통령의 덕목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전략으로 유효했다.
안타까운 일은 대통령의 결단과 정책추진을 돕는 참모들이고, 그 책임의 소재다. 대통령으로 하여금 외길로만 치달아 「잃은자」가 되도록 「도왔던」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상무이사 겸 심의실장>상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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