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마리의 뱀 거기서 생이 빛나고…한 점의 그림이나 조각에는 작가의 사상과 감정, 의지와 철학이 담겨 있다. 선택된 색채나 필획 하나하나, 소재마다에서는 남모르게 흘렸던 눈물이나 애틋한 사랑, 힘겹게 살며 터득한 인생관과 새로운 희망을 읽을 수 있다. 국내화단을 대표하는 원로·중진작가가 추천하는 자신의 대표작을 소개하고 작품에 얽힌 감동적인 일화와 뒷얘기를 들어보는 시리즈를 마련한다.<편집자 주>편집자>
35마리의 뱀이 또아리를 틀며 엉켜있다.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혀를 날름거리는 형상이 금방이라도 기어나올 듯하다.
한국화가 천경자 화백의 「생태」는 흉칙하고 소름끼치는 뱀의 형상 앞에서 작가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희망을 찾아낸 그림이다.
천화백은 이 작품을 한국전쟁 때 그렸다. 1944년 도쿄(동경)에서 미술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겪었던 혹독한 시련과 고통이 작품의 씨앗이 됐다. 멀쩡했던 집안이 몰락했고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데 이어 부친마저 타계했다. 당시 그는 희망없는 삶에 심한 회의를 느꼈다.
마음을 정하지못하고 방황하던 중 우연히 광주역 앞 뱀집을 지나다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수십마리의 뱀을 발견했다. 섬뜩한 전율감이 온몸을 감싸면서 가슴 깊은 곳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풀리고 갑자기 의욕이 솟구쳤다. 다시 붓을 잡은 이날부터 두달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뱀집을 찾아 한마리씩 스케치했다. 전체적인 구도는 시골학교 운동장에서 까만 옷을 입고 모자를 쓴 아이들이 뛰놀던 장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모자가 솟구칠 때마다 뱀의 머리가 연상됐고 손을 잡고 있는 움직이는 모습은 영락없는 뱀으로 보였다.
40호 크기의 이 그림은 광주 금융조합전시에 이어 52년 부산피란시절 국제구락부에서 공개됐다. 「생태」라는 제목은 연극인 이원경씨가 붙였다. 이 작품은 전시 첫날부터 부산화단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풍경화와 정물화가 화단을 지배하던 당시 흉칙한 뱀을, 그것도 새파란 여자가 그렸다는 것은 단순한 뉴스차원을 넘어 충격적이었다. 혼자사는 여자가 뱀을 키운다느니, 옷속에 지니고 다닌다는 등 해괴한 소문도 뒤따랐다. 그러나 당시 화단을 주도하던 이쾌대 김환기 윤효중화백에게서 실력을 인정받았고 이를 계기로 홍익대 전임강사가 됐다.
미술평론가 신항섭씨는 「생태」에 대해 『특이한 소재 이면에 숨겨진 내용은 사회적인 인습과 도덕에 안주하는 화단의 나태함을 겨냥한 반기이자 혁명의 노래』라며 『왜색풍의 작가라고 치부하던 화단의 손가락질을 간단히 잠재울 만큼 파장이 컸다』고 말했다.
천화백은 이 작품으로 일약 스타작가가 됐다. 69년 남태평양섬을 여행한 후에는 작가 특유의 매혹적인 색채가 돋보이는 「사군도·사군도」를 완성, 달관적인 삶의 자세와 원숙한 정서를 보여주었다. 작업실을 겸해 쓰는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 거실에서 가장 잘보이는 곳에 「생태」를 걸어 놓고 있는 그는 『뱀그림은 힘겨울 때 용기를, 슬플 때 위안을, 화가 날 때는 평안을 주는 부적과 같은 작품』이라고 말했다.<최진환 기자>최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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