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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씨 일가 북한증언(탈북 17인은 말한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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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씨 일가 북한증언(탈북 17인은 말한다:상)

입력
1997.0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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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9일 44일간의 엑소더스끝에 서울에 도착했던 김경호(61)씨 일가 16명과 이들과 함께 탈북했던 사회안전부 노무원 최영호(30)씨 등은 20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탈북경위와 서울에서의 생활 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다섯가족이 기자들의 그룹인터뷰에 응한 내용을 두차례에 걸쳐 정리한다.<편집자 주> ◎큰딸 ‘식량 유랑’ 떠나 못데려와/‘부모님 미국 있다’ 청천벽력 소식에 감시의 두려움/94년부터 배급안돼 세간 팔거나 물고기로 연명

대탈출드라마를 진두지휘한 김경호씨의 부인 최현실(57)씨는 해외 친·인척 접촉부터 탈북결심까지의 숨은 일화를 소상하게 털어놓았다.

92년 2월께였다. 회령시 해외 동포영접과(과거 교포과)에서 막내(김성철)를 두차례 불러『해외에 친척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예감이 심상치 않았다. 그해 3월 보위지도부원에게 찾아가 물어보니 『부모님이 미국에 있다』는 청천벽력같은 애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주소는 모른다고 했다.

「서울에 사는 줄만 알았던 부모님이 미국에 계시다니…」 최씨는 정말 믿기지 않았다. 순간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다. 월남자가족인데다 미국에 친척이 있을 경우 엄청난 감시를 받기 때문이다.

최씨는 그해 8월에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평남 남포시 강서구역에 사는 이모를 찾아갔다. 이모는 뉴욕에 있는 부모님의 주소를 알고 있었다. 곧장 평양으로 달려가 영어를 아는 친척에게 편지주소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얼굴을 몰라볼 것 같아 사진을 찍어 동봉했다.

『살아계신다니 너무나 기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건강하게 잘지내고 계신지요. 이북에서 저희는 모두 건강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빨리 통일이 돼 함께 잘살고 싶습니다』

어렵게 쓴 편지를 부친 지 꼬박 50일만에 답장이 왔다. 『내딸이 맞느냐.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느냐. 혹시 공산당이 딸의 모습을 조작한 것은 아니냐… 이유야 어떻든 부모로서 자식을 건사하지 못해 미안하다. 꼭 볼 수 있도록 하자꾸나』

답장과 함께 500달러가 담겨 있었다. 그후 최씨가 결혼식사진과 자식들 사진을 보내자 부모님은 자신과 동생들 사진을 부쳐왔다. 답장은 보통 40∼50일만에 왔는데 3개월, 혹은 6개월마다 보내준 달러송금이 없었더라면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92년부터 식량사정이 눈에 띄게 어려워졌다. 94년부터는 밀린 배급을 제때 안주더니 지난해에는 더욱 심해졌다. 세간살이를 팔거나 물고기를 잡아 겨우 연명을 해야 했다.

500달러면 2남4녀 21명 대가족이 2∼3개월을 먹고 살 수 있다. 최씨는 이 돈으로 쌀과 옷, 생필품 등을 사서 가족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외화상점에 100달러를 내면 바뀜돈표 203∼210원을 준다. 바뀜돈표 1원은 북한돈 100원이다. 쌀 1㎏이 80원이라 100달러는 북한돈으로 1만8,000원이 되는 거금이다. 외화는 청진의 합영은행에서 현금으로 바꾸었고 약품 등 물건은 회령 체신소에서 보위부원이 검열한 뒤 주었다. 편지도 모두 검열을 받았다.

그러나 94년 김일성 사망이후에는 달러를 바꾸기가 어려워졌다. 송금된 500달러중 200달러만 환산해주고 나머지는 2년마다 조금씩 찾도록 했다.

지난해 7월 인편을 통해 전해듣고 어머니를 만나러 중국에 갔다. 48년만의 감격적인 상봉이었다. 처음엔 서로 잘 몰라봤다. 3일동안 부둥켜 안고 울기만 했다. 어머니는 최씨에게 『한국에서 잘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했다. 어머님과 헤어지고 나자 깊은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여름철 홍수로 불어났던 두만강 물이 줄어든 9월5일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9월6일 큰아들 집에서 아들 형제와 며느리 셋째딸, 사위 등에게 탈출결심을 얘기했다. 모두들 동의했다. 탈출때까지 한달동안 큰아들 집에 눌러 앉아 탈출을 계획했다. 강원 원산에 살다 식량난때문에 집을 팔고 유랑생활을 하는 큰딸(39)이 지난해 7월이후 연락이 되지않아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북한에는 큰딸처럼 식량난때문에 집을 팔고 유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10월26일 새벽 4시 진눈깨비를 헤치며 국경강가에 도착했을 때 더이상 뒤돌아 보고 싶지 않았다.<박진용 기자>

◎인민반장의 역할/주민동원 정치­교양사업·송이채취 등 외화벌이

김경호씨의 3녀 명숙(34)씨는 함북 회령시 남문동의 인민반장 출신. 언어구사에 조리가 분명해 지난해 말 합동 기자회견때 취재진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러나 명숙씨는 92∼95년까지 34세대의 인민반장을 하면서 가슴앓이를 많이 했다. 인민반장은 주민들을 정치·경제·교양 사업에 동원하는 일이 주임무.주민들의 생활고를 뻔히 아는 처지에 「참석 불량자」들을 보고하라는 상부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인민반은 당의 지침인 무역·농업·경공업·군사 제일주의를 관철하기 위해서 주부·학생·노인들을 동원한다. 무역에 관해서는 외화를 벌기 위해 송이·오미자·고사리·도라지 등을 채취하고, 농업에 관해서는 농장에 가서 강냉이와 벼를 심고 겨울에는 퇴비를 만든다. 경공업에 관해서는 고철과 깨진 유리, 빈병, 파지들을 수집하고 군사에 관해서는 방공호 건립과 전쟁훈련에 참여한다.

『전에는 이런 일에 참여하면 물질적 보상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없어졌다. 지난해에는 매달 세대별 급식량이 3㎏밖에 안돼 대부분 주민들이 장사해서 먹고 사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해도나 함남·평남 등지에서 쌀을 사와 암시장에서 10원 정도 남겨 팔거나 떡·빵을 만들어 조금씩 이익을 보는 식이다』

인민반장직은 93년부터 국경지역에 한해 한달에 30원씩 받는 유급제가 됐다. 인민반은 30∼40 세대로 구성되며 인민반 40여개가 하나의 동을 이룬다. 인민반장은 동사무소에서 임명하며 1개 동에서 가장 모범적 인민반에 「붉은기 인민반」이라는 칭호가 주어진다.<박진용 기자>

◎허술한 국경경비대/200불정도 뇌물주면 밀수 ‘식은죽 먹기’/중항의 우려 불법월경 사격안해

국경경비대의 임무는 간첩과 밀수업자, 탈북자들의 불법 월경을 저지하는 것이다. 북한은 탈북자가 늘어나자 지난 95년말 국경경비 업무를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인민무력부로 이관했다. 그러나 83년 5월부터 92년 10월까지 10년 넘게 두만강 일대의 북·중 접경지역인 함북 회령시 강안동 21여단 12대대에서 경비대원으로 근무했던 최영호(30)씨는 『조·중 우호관계와 장비 부족, 그리고 뇌물의 성행 등으로 실제 국경경비는 철저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인들에게는 조·중 우호관계 때문에 불법 밀수나 월경 현장이 적발되더라도 사격하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와 있다. 경비 근무 때 총을 갖고 나가지 않을 때도 많다. 조·중 관계를 생각할 때 잘못 해서 중국으로부터 항의라도 들어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철조망은 물론 없다. 중국측에서는 경비대원도 세우지 않고 있다. 불법 월경을 차단하기 힘든 것은 당연하다. 발각이 안되면 탈북 사건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최씨는 『경험 많은 밀수업자들과 고참 경비대원들은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며 『뇌물이 오고 가는 것은 물어보나 마나』라고 말했다. 『밀수를 묵인해주는 대가는 많을 경우 4만∼5만원으로 미국돈으로 200달러 가량 된다. 근로자 의 평균 월급이 80원 정도이기 때문에 받는 사람에게는 큰 돈이지만 밀수업자나 장사꾼들에게는 별로 큰 돈이 아니다. 나도 100달러짜리 10장까지 받아본 적이 있다. 보통 술 담배 옷가지들이 뇌물로 오간다』

최씨에 따르면 종전에 대원들에게 지급했던 충전용 러시아제 야시경과 전자충격봉도 91년에 회수됐다. 사격훈련도 1년에 7∼8회가 고작이다. 그나마 한 번에 3번 사격한다. 전지와 총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초소 간격을 기존의 4㎞에서 2㎞로 좁히고 인원을 늘렸다. 하지만 이쪽 경비대원들과 사정을 잘 아는 밀수업자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다』

북한 청년들에게 국경경비대는 인기가 높다. 1일 급식량이 700g으로 정상배급되고 있고 94년부터는 초소에 일제 버튼식 컬러 TV와 비디오가 보급된데다 무엇보다 「부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최씨에 따르면 국경경비대원의 하루는 여름은 상오 5시, 겨울은 상오 6시부터 시작된다. 아침체조, 청소 및 세면, 신문 열람, 경비 근무 등으로 상오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점심식사 후 격술·경비전술·대련·정치학습·무기청소 등의 훈련에 들어간다. 저녁에는 노래부르기가 주종인 오락시간과 TV시청시간을 가진 뒤 야간근무에 투입되거나 하오 10시께 취침한다. 보통 한 초소(초소장 소위)에서 20여명이 공동생활한다.

최씨는 『탈북사건이 밝혀지면 문책이 심하기 때문에 해안경비대 등에 비하면 긴장된 생활을 한다』고 말했다.<김병찬 기자>

◎회령 비밀술집 성행/돼지불고기 안주는 ‘기본’/큰돈 버는 국경상인들 ‘북적’

『돼지불고기 안주가 없으면 술 안마신다』

북한에서 술 판매는 엄격한 통제를 받지만 함북 회령시에는 불법 술집들이 성행하고 있다. 이유는 두가지. 하나는 대부분 공장의 가동이 중단되는 등 주민들이 할 일이 없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국경지대 등지에서 장사를 해 목돈을 만지는 사람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사회안전부 노무원 출신인 최영호(30)씨가 알고 있는 회령의 비밀 술집만 4개. 이들 술집은 일반 가옥 안에 있으며 아주머니 3∼4명이 술을 담그고 사탕·고추·깨 가루를 섞은 초장과 돼지불고기, 풋고추를 안주 세트로 내놓는다. 돼지불고기 한 접시는 100원, 밀주 1병은 30∼45원이다. 근로자의 한달 평균 월급이 80원인 점을 감안하면 큰 돈이다.그러나 보통 20∼30명이 자리를 채운다. 지하경제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이다.

『직장에서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술집에 모여든다. 점심때 20∼30명이 한 술집에 모여 3∼4시간동안 2홉들이 술 3∼4병씩을 마시는 일이 많다. 직장에서도 특별히 일이 없어 신경을 쓰지 않는다. 경찰격인 사회안전부 담당요원들도 술집 주인들로부터 일정액을 상납 받고 장사를 묵인해 준다』

최씨는『돼지불고기 한 접시 값인 100원정도는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별 부담이 안된다』며 그들은 물고기나 여우털가죽, 사금을 중국사람들에게 팔아 큰 돈을 벌기 때문에 술 한병에 돼지불고기는 기본이라고 말했다. 최씨가 사회안전부에서 받는 월급은 73원에 불과하지만 최씨도 장사로 돈을 벌기 때문에 술집을 자주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술은 보통 20도짜리고 화제는 주로 장사나 돈 번 경험, 가족에 관한 것 등이다. 회령사람들 대부분이 어떤방법으로든지 국경등지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정치, 김일성·김정일에 관한 얘기는 아예 하지 않는다』

해외 친척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던 셋째 사위 박수철(38·양정사업소 기계수리공)씨도 술집을 애용했다. 박씨는 『보통 안주인 두부 한 접시는 19원』이라며 『원래는 선불인데 막무가내로 술을 시켜먹고 나중에 갚겠다고 우기는 손님들이 있어 간혹 시비가 벌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김병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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