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원대상 0순위 중간관리자들 모이면 전직·창업이야기/위로금 준 ‘명퇴’가 차라리 부럽기도『언제 쫓겨날 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분위기로 보아 40세가 되기 전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뭔가 대책을 찾아야 하긴 하는데…』
H그룹 계열사에 근무하는 P(37) 과장은 『어느날 갑자기 내쫓기기 전에 회사를 그만 두고 딴 길을 찾고 싶지만 마땅한 일거리가 없다』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회사에 대한 애정이 식어 버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인사과에서 전화만 걸려 와도 가슴이 철렁한다. 퇴근후 아내와 두딸을 보면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다고도 했다. 실직에 대한 불안은 더이상 P과장만의 고민이 아니다. 밀려 오고 있는 고용대란의 먹구름은 예사롭지가 않다.
지난해 일었던 명예퇴직 바람은 올해부터 본격화할 「실직 한파」의 전주곡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 민간경제연구소는 『경제성장률이 6%대면 2, 3년이 지나지 않아 실업률이 3%를 넘어서고 실업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를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아 충격을 던졌다. 그런 조짐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선 사무실마다 고용불안의 그림자가 짙다. 샐러리맨들은 『경기불황에 따른 기업의 감량경영 움직임으로 보아 머지않아 감원 회오리가 불어닥칠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낸다. 특히 월급이 많고 인사 적체가 심해 「감원대상 O순위」로 꼽히는 과장 차장 부장 등 중간관리자와 임원들은 엄청난 실직불안증에 시달리고 있다.
K기업의 H(45) 과장은 머지않아 닥칠 실직 한파를 이렇게 우려했다. 『동료들이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전직이나 창업 얘기를 주고 받습니다. 몇몇 부장은 불안한 장래에 미리 대처하기 위해 친구나 선후배를 만나 귀동냥을 하느라 출근한 뒤 하루종일 자리를 비우기도 해요. 사무실 분위기가 축 처져 있어 일할 맛이 나지 않습니다. 정리해고제가 시행돼도 노조와의 정면충돌 가능성 때문에 아주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하급직원의 해고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40, 50대 중간관리직은 아무런 방패막이가 없어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어요』
포스틸의 한 직원은 『지난해 명예퇴직 때는 퇴직금 외에 별도의 위로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억울하긴해도 목돈을 챙길 수 있었다』며 『3월부터 정리해고제가 발효할 경우 그런 「선물」은 상상할 수도 없는데다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면 그냥 내몰릴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허탈한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쫓겨 나면 모든 가족이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두 자녀의 교육비를 감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대부분의 40, 50대 직장인들은 『만에 하나 실직할 경우 한달에 수십만원에 달하는 애들 교육비는 어떻게 대느냐』고 한숨짓기 일쑤다.
LG경제연구원의 김성식 연구원은 『그동안 우리 경제의 고도성장기에 힘입어 왕성한 고용창출만 있었다』며 『서구에서 보편화한 해고가 아직 우리사회에는 생소해 실직충격은 더욱 클 수 밖에 없다』고 분석했다.<김성호 기자>김성호>
◎‘금융계 빅뱅’ 은행원도 좌불안석/“전직원 3분의 1 감축” 소문 흉흉/“노조가 명예퇴직 요구를” 주장도
은행원들이 실직 공포에 떨고 있다. 안 그래도 정리해고제 도입으로 뒤숭숭한 데다 금융계의 「빅뱅」으로 불리는 금융개혁에 따른 은행간 통·폐합 과정에서 감원바람이 휘몰아칠 것이기 때문이다. 권한은 크지 않으면서도 임금이 많은 차장급 이상 직원들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이다.
한국생산성본부의 한 관계자는 『올해 실직문제가 가장 심각해 질 분야는 바로 금융계』라며 『전체 금융계 직원의 3분의 1 정도가 감축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상업은행 노조의 강성만 홍보교육2부장은 감원태풍을 앞두고 있는 은행권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정리해고제에 대해 상당한 불안감을 갖고 있어요. 특히 인사적체가 심한 차장급 직원과 단순업무를 담당하는 여직원들의 동요가 심합니다. 심지어 「노조가 앞장서서 명예퇴직을 실시하도록 해야 한다」는 요구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조흥은행의 L(35) 대리는 『특별한 기술이 없는 은행원들에게 실직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며 『다른 업종에 종사한 사람에 비해 세상물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퇴직후 개인사업을 하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 동료들의 눈을 피해 외국어 학원에 다니고 있는 그는 『자본시장 개방으로 외국은행이 국내로 진출하면 현지인을 채용할 것이고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최근들어 실직에 대비해 나름대로의 카드를 준비하는 「더블 플레이 직원」이 부쩍 늘었다』고 덧붙였다.
◎실직공포증 시달리는 직장인 많다/회사·사회에 극도 배신감/불면증·우울증 등 호소/심하면 알코올중독 빠져 성적으로 무기력해지기도
『아내와 아이들 얼굴을 대하기 겁난다』 『약물의 도움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불면증에 시달린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보기 싫다』 『이유없이 머리가 아프고 식욕이 없다』 등등.
실업상태에 있거나 실직을 우려하는 40, 50대 중년들이 신경정신과를 찾아와 털어놓는 하소연이다. 경기불황과 기업체의 감량경영에 따른 고용불안이 확산되면서 대인공포증 우울증 불면증 등 「실직공포증후군」을 호소하는 직장인들이 잇따르고 있다. 그들의 표정이 수심에 젖어 들면서 가정의 평화도 함께 흔들린다. 지난해 해운회사에서 부장으로 근무하다 대기발령을 받고 회사를 그만둔 최모(43)씨. 퇴직후 2개월 동안 집에서 무위도식하다 『장사라도 해야겠다』고 아내한테 반강제적으로 얻어 낸 5,000만원을 사기로 몽땅 날려버린 뒤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요즘 그는 술기운을 빌리지 않고는 하루도 넘길 수 없는 알코올 의존증에 빠져 있다. 중학생과 초등학생 등 두 아들을 두고 있는 그의 아내는 『당장 애들 교육문제가 목엣가시처럼 걸려있어 막막할 뿐』이라고 탄식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강원룡 박사는 『실직공포증후군 환자들은 대부분 사회나 회사에 대해 극도의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며 『「실직하면 가족이나 친지들이 전처럼 대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지레짐작에 따른 불안증을 앓는 사람도 많다』고 귀띔했다. 그는 『심지어 두통과 소화불량 등을 호소하며 「죽을 병에 걸렸다」고 우기는 건강염려증 환자도 있는데 자신의 몸에 신경을 씀으로써 실직에 대한 두려움을 잊으려는 잠재의식의 표출』이라고 진단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인 광혜병원 신승철 원장은 『실직에 대한 두려움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말수가 줄어 들고 자주 짜증을 내게 된다』며 『성적으로도 무력해져 자연히 부부 사이에 오해가 생기고 속도 모르는 아내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으로 의심하기도 한다』고 상담사례를 전했다. 다른 전문가들도 『실직에 따른 좌절감은 성적 무력증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라며 『아내를 비롯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따스한 관심과 이해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김성호 기자>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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