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 신한국당이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기습처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분노이전의 의문을 가졌다. 두 전직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명분중에는 쿠데타와 뇌물의 청산뿐 아니라 온갖 정치악습의 청산이 포함되어 있을 터인데, 저런 악습을 되풀이하는 심리상태는 과연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가장 컸다. 그리고 다음에는 한밤중에 일사불란하게 국회의사당에 잠입하여 날치기 표결에 참가한 150명의 의원들, 특히 대권후보로 부상하고 있는 몇몇 인물들의 양식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그 법안들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것이 각자의 소신이었다 하더라도 날치기 표결에 어느 한 사람 반발하지 않고 얌전하게 순종했다는 것은 신한국당의 구조적 취약점이고, 이른바 「김심」의 부작용이다. 누가 대통령후보가 될 것인지는 내손에 달렸다는 대통령의 자세가 당을 경직시키고, 토론을 잠재우고, 양식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 노동계의 파업과 국민의 불만이 확산되자 정부여당은 뒤늦게 수습책을 찾고 있는데, 날치기 이전에 충분히 예상되었고 사태를 눈감았던 그들의 숨은 손익계산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제라도 당의 운영과 대선후보 선출방식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 그는 새해 기자회견에서 『신한국당을 책임지고 있는 총재로서 대선후보에 대한 분명한 나의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여러갈래로 해석될 수 있겠으나, 정가와 언론은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개입의지 표명」으로 해석하고 있다. 대통령이 특정인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거나, 특정인을 묵시적으로 부상시켜 지원할 것이라는 방법론까지 나오고 있다. 만일 그런 해석이 맞는다면 유감스런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적인 현실」을 이유로 대통령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대통령이 개입하지 않으면 경선분위기가 과열되어 엉망이 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후보가 선출되거나 당이 깨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당총재가 자기당 대선후보를 결정하는 일에 어떻게 초연할 수 있느냐, 후보지명과 선거운동을 주도하여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이야말로 총재의 책무가 아니냐, 다른 선진국에서도 대통령이 특정후보를 지지하고 선거운동에 앞장서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주장들은 일리가 있으나, 한국식 후계자 지명과 대통령만들기의 폐단을 외면하고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흔히 대선후보를 「대권후보」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상 한국의 대통령은 절대군주에 버금가는 대권을 갖고 있다. 문민정부임을 강조해온 김대통령도 과거의 군출신 대통령들 못지 않은 대권을 행사해 왔다. 이처럼 대통령의 권한과 영향력이 막강한 나라에서 대통령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차기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집념을 갖는다면 엄청난 부작용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한국의 여당은 인물·자금·조직력 등에서 월등한 입장에 있고, 우리 사회에는 정권교체로 인한 권력이동과 변화를 원치 않는 상당한 세력이 형성돼 있다. 야당후보가 난립하는 상황에서는 대통령의 차기대통령 만들기가 좀더 쉬워진다. 결과적으로 국민은 대통령을 선출할 때 차기대통령 결정권까지 그에게 준 꼴이 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때 대통령의 후계자지명은 사실상 월권이고, 국민의 대통령 선택권을 제한하여 선거의 정신을 훼손하는 행위가 된다.
김영삼 대통령은 「후계자지명」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세대교체, 세계화, 도덕성과 개혁의지 등 그가 차기대통령에게 기대하는 조건들은 분명히 나라의 장래를 위한 심사숙고에서 나왔을 것이다. 사심없이 오랜시간 각후보의 자질을 검토해온 자기야말로 후보결정의 적임자이고, 그것이 대통령으로서의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부여된 더 큰 임무는 후계자지명의 악순환을 끊는 것이다. 국민이 뽑아준 대통령이기 전에 전직 대통령이 만들어준 대통령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는 부담을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집권초의 순수한 개혁의지로 돌아간다면 어떤 결정이 진정한 나라의 장래를 위한 것인지 답이 나올 것이다.<이사대우 편집위원·도쿄에서>이사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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