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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사태’29년만에22일 목사안수받는 김신조씨(한국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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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사태’29년만에22일 목사안수받는 김신조씨(한국인터뷰)

입력
1997.0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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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되면 고향 청진서 목회활동”/부인 집사­딸·사위 신학대 출신 신앙인 가족/귀순용사 영웅만들기 앞서 기술교육 등 실시를/지원도 좋지만 북한이 먼저 진실성 보여줘야68년 「1·21사태」의 주역 김신조(55)씨가 22일 상오 10시30분 서울 신길동 성락침례교회(당회장 김기동 목사)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의 길에 들어선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위해 침투한 공비 31명 중 유일한 생존자인 그에게 1월21일은 부활의 날이나 다름없다. 예수의 부활은 인류에게 사랑과 영생의 메시지를 남겼지만, 「공비원조」 김신조에게 그 부활은 기쁨보다는 오랫동안 호된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상상도 못할 갈등을 극복하고 마침내 부활의 참 의미를 소중히 되새기면서 성락교회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는 그를 만나 파란 많은 삶과 신앙고백을 들어보았다.<편집자 주>

□대담:이기창 문화부 차장

-우선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는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성직자는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희생·헌신해야 합니다. 주님과 교회를 위해 앞으로 남은 삶을 바칠 각오입니다. 또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신뢰받는 목회자가 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안수날짜를 1월22일로 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 1월21일은 제가 새 삶을 찾은 날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눈을 뜨게 해준 성락침례교회 김기동 목사님이 「1·21사태」 만 29년에 맞춰 안수받는 것이 어떠냐는 제의를 해 받아들였습니다. 그 날이 마침 화요일이라 신도들의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수요예배가 있는 날로 하루 늦췄습니다』

-북한에서는 종교에 접할 기회가 없었을텐데 어떤 동기로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는지요.

『집사람과 아이들의 성화를 견디다 못해 81년 4월 처음 교회에 나갔으나 처음에는 기독교와 북한체제의 유사성 때문에 많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김일성, 구역장은 세포책임비서, 회개는 자아비판, 새벽기도는 새벽별 보기운동 등 옛날 생각이 그대로 되살아났습니다. 모든 귀순용사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봅니다. 그 후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부터 하나님의 양이 되었고 자연히 술과 담배를 끊고 방탕한 생활도 청산하게 됐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좀 말씀해주시지요.

『새벽 4시반 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습니다. 기독인월남(귀순)용사선교회 관리, 신앙간증, 귀순자들을 돌보는 일 등 하루 24시간이 모자랍니다』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십니까.

『집사람(최정화 집사·53)과 재작년에 출가한 남희(27), 미국에서 회계학을 전공하는 아들 성환(25) 등이 가족의 전부입니다. 사위는 신학교에서 만난 신앙동지이며 집사람과는 70년 「주간한국」의 컬러표지인물로 기사가 나가는 바람에 서둘러 결혼하게 됐지요』

-귀순 후 지금까지 생활은 어떻게 해왔습니까.

『반공강연과 간증집회의 강연료가 주된 수입원이었지요. 70년부터 82년까지는 삼부토건에 적을 두고 반공강연에 나갔지만 간증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신앙간증의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전향 후 부모님의 처형설을 듣고 난 후의 죄책감, 자본주의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가졌던 인간적 갈등 및 고뇌, 여러차례 자살기도에 얽힌 사연 등을 이야기 합니다』

-현재 600여명에 이르는 귀순용사 중 많은 사람이 한국사회에 적응못하고 좌절과 방황을 거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분들에게 도움말을 해 주시지요.

『귀순용사가 오면 온갖 매스컴이 나서서 일시적으로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데 그러면 안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과 삶의 방식에 전혀 익숙하지 못한 그들은 시간이 흘러 사회의 관심이 멀어지면 배신감과 갈등을 느끼다 자포자기적인 삶의 길을 가게 됩니다. 물질적인 베품도 중요하지만 그못지 않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스스로 우리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이나 기술을 가르쳐야 합니다』

-귀순자에 대한 정부의 지원문제는 어떻습니까. 68년 귀순 당시에는 정착금이나 정부지원금을 받았는지요.

『5공화국 당시에는 「귀순북한동포보호법」에 따라 주택제공과 직장알선 등 지원이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문민정부에서 북한주민의 대거탈북을 예상하고 그 법을 폐지, 한동안 귀순용사들이 지원을 받지 못했는데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습니다. 정부가 저에게 많은 것을 지원한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북한이 강릉에 잠수함을 침투시키는 등 남북의 화해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남북관계를 어떻게 보십니까.

『북한이 진실해야 합니다. 정말 그들이 평화를 원한다면 특수부대부터 없애야 합니다. 그동안 남북의 긴장관계는 북한의 특수부대에 의해 주도적으로 조성돼왔거든요』

-최근 종교계를 비롯해 북한동포돕기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인도적 차원의 지원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북한동포를 돕자는데는 찬성합니다. 다만 북한이 진실하게 나올 때 지원해야 합니다. 잘못한 것은 시인해야 합니다.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것은 같은 일을 또 저지르겠다는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한 때 「무장공비 김신조」라는 꼬리표 때문에 「김재현」으로 개명까지 했는데.

『목사 안수도 김신조라는 이름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호적 등 서류상으로 기록하는 공식적인 경우에는 김재현을 쓰고 있습니다. 부모가 지어 주신 김신조로 살고 싶습니다』

-2년전 출간한 자전에세이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의 말미에 「너무 늦기전에 그리운 가족들끼리 만나 서로의 늙어진 얼굴을 어루만져 보고 싶다」는 인간적 바람을 털어놓았는데 북한의 가족 소식은 들어보았는지요.

『부모님과 위로 누님 두 분, 아래로 남동생 넷을 두고 왔습니다. 부모님은 처형됐으며 형제들은 강제수용소에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생사여부는 모릅니다. 나이가 드니까 혈육에 대한 정이 더욱 깊어집니다』

-무장공비의 아들이라는 친구들의 따돌림을 감수해야 했던 남매와 남편하나만을 믿고 젊음을 바친 아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모진 시련속에서도 저같은 남편을 위해 늘 기도하고 보살펴 준 집사람이 너무 고맙고, 아이들도 그늘없이 건강하고 지혜롭게 자라주어 감사하게 생각하고 삽니다. 그들이 주위의 따가운 눈총 속에서도 오히려 저를 도와주고 위로해준 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통일이 되면 가장 먼저 무슨 일을 하고 싶습니까.

『저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을 형제들을 찾아본 뒤 고향 청진에 가장 먼저 교회를 세우고 목회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목사가 된 뒤에도 귀순용사를 중심으로 한 목회활동에 힘쓸 생각입니다』<정리=여동은 기자>

□약력

▲1942년 함북 청진 출생 ▲61년 흥남기계전문대 졸업 ▲68년 1월21일 북한 124군부대 특수요원으로 남파, 전향 ▲89년 경원대 경영대학원 졸업 ▲91년 서울침례신학교 졸업 ▲91년 2월 전도사 ▲94년 서울침례신학교 대학원 졸업 ▲94년 10월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 출간 ▲96년 「날지 않는 기러기」 출간 ▲현재 사단법인 기독인월남(귀순)용사 선교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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