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1916∼1956)에게 웬 자화상? 울부짖는 듯한 소머리 그림 정도를 민족을 상징한 것이라 이해해 「자전적」이라 부를 수 있을 지는 몰라도.그러나 유명한 가족 연작에는 길쭉한 얼굴에 코밑 수염의 자신을 등장시켰고, 엽서에 그린 「길 떠나는 가족」, 부인과 입맞추는 장면을 그린 소묘도 분명 자화상이다. 담배 싼 은박지를 긁고 담뱃진이나 물감을 발라 형상을 드러나게 한 화가로서의 자신의 모습이 여러번 나온다.
이중섭의 그림들에서 유화나 소묘를 막론하고 자화상이라 할 그림이 적지 않은데, 자신 말고는 다른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단독상이라야 자화상다운 자화상은 아닌 것이다. 그에게도 단독 자화상이 하나 있으니 「판잣집 화실」로 알려진 채색 소묘다.
그림 가운데에는 적당한 크기로 네모지게 줄을 그어 한 칸 집을 설정했다. 그런 집과는 따로 실내는 바닥과 2면의 벽으로 나누었다. 화가는 한바탕 그림을 그린 뒤 담뱃불을 붙인 채 『이제 오늘 일은 다 했다』는 느긋한 자세로 누웠다. 벽에 이리저리 붙인 그림 중에는 서로 뿔을 맞대고 싸우는 소그림, 새 두마리가 서로 애타하며 만나려는 그림 등 유명해진 그림도 보인다. 바닥에도 이제 막 그렸음직한 그림들이 포개져 있고, 물감판과 붓들이 널려져 있다.
붓 위쪽에 한자로 「대구… 이중섭」이라 적힌 엽서는 같이 살기에 힘들어 처가인 일본에 가 있는 가족들에게 보고픈 심정을 담아 보냈던 것이리라. 노랗게 칠해 밝고 돋보이게 한 실내에 어지럽게 널려진 사물들은 어둡고 고요하기만 한 바깥과 대조되어 더욱 생기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나무들도 잎을 벗은 분위기로 미루어 추운 때인 것 같은데 천정 알전구와 더불어 유일하게 불그레하게 색칠된 자신은 알몸인 듯 하지만 노출에 관한 후세의 검열을 예견(?)했는지 조각 이불로 흠될 부분만을 살짝 가렸다.
능숙하게 빨리 그렸을 이 그림은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살뜰한 배려가 구석구석에까지 미쳐 소묘라고 낮춰 보기는 어렵다. 평양 근교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식민통치 아래서나마 손꼽히던 민족학교인 오산중학(5년제)에서 선구적 화가 임용련, 백남순 부부로부터 미술가의 기본을 익혔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사립 미술 학교를 다니며 활발히 작품을 발표했던 이중섭. 평생 변함없이 자신의 이름을 한글 자모를 풀어써서 자기다움을 빛냈던 사람. 곡절 많았던 사랑의 사연. 보호자이면서 수준 높은 서예가로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 형이 6·25 직전 북한 당국에 의해 죽은 후 가족을 이끌고 월남해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인정있던 사람. 그가 이중섭이다. 이 그림을 그린 후 그는 영양 실조와 고생으로 발병, 서울로 옮겨와 병원을 전전하다가 세상을 떴다.<최석태 미술평론가>최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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