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집회·최루탄 어수선한 일요일/김 추기경 이례적 정오미사 집전명동성당에 고뇌가 흐른다. 사랑과 평화로 충만해야 할 「성역」 명동성당에는 안개만 자욱하다. 김수환 추기경이 12일 강론에서 촉구한 대화와 타협의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 김추기경과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 신자들과 노조원들의 얼굴은 좀처럼 밝지 않다.
명동성당에서는 이날 「주의 세례축일」미사가 열렸다. 예수님이 자신을 죄인이라 부르고 세례를 받은 날이다. 김추기경은 『정치지도자는 그런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한다』고 설파했다.
김추기경은 상오 11시50분께 주교관을 나섰다. 낮 12시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서였다. 통상 김추기경이 부활절 성탄절 등 대미사만 집전하는 관례에 비춰 이례적인 일이었다. 주교관에서 본당 출입구까지는 불과 20여m. 때마침 건물사이 공간에서는 권위원장 등 농성중인 민주노총 지도부의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었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김추기경과 걸어가는 김추기경 모습을 본 권위원장. 고뇌하는 주인과 피난자대표는 말없는 대화를 나눴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추기경이 본당 내부에 모습을 나타내기 전 신자들에게는 10일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등이 발표한 성명서를 인쇄한 유인물이 배포됐다. 김추기경이 노동관계법 기습통과가 잘못된 것이라는 성명내용이 천주교회의 공식입장이라는 점을 밝히고 대화와 타협을 촉구하자 신자들은 공감했다. 김종욱(35)씨는 『성당이 공권력과 노동자들이 충돌하는 현장이 되어서는 안된다』며 『정부와 노동계 모두 대화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사에는 농성중인 민주노총 배범식 부위원장도 참석했다. 그는 가톨릭신자다. 김추기경이 민주노총에 『성역에 걸맞은 행동을 해달라』고 주문한 데 대해 그는 『민주노총도 성당의 고충을 잘 알고 있으며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사가 계속되는 동안 본당 옆 텐트에서는 권위원장 등 민주노총 지도부가 난로불을 쬐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명동성당은 그러나 김추기경 집전 미사가 끝나자 다시 시끄러워 졌다. 노조원 1천여명은 집회를 갖고 노동관계법 무효화 등을 요구했다. 김추기경이 『누구를 타도하자느니 하는 미움과 증오를 선동하는 말이 성당을 배경으로 있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라고 강론한 지 불과 몇 시간도 안된 시각이었다.
곧 이어 명동성당의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성당입구계단에서 집회중인 노조원들을 향해 경찰이 최루탄을 쏘았다. 이에 앞서 이한선 성북경찰서장 등은 사전구속영장을 제시하며 권위원장 등 지도부의 구속을 집행하려 했으나 노조원 저지로 무산됐다. 명동성당은 현 시국상황의 압축된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이동훈 기자>이동훈>
◎김 추기경 강론 요지
우리 사회는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변칙처리된 노동법과 안기부법으로 어려운 지금의 시국에 대한 교회의 입장이 무엇인지는 주보에 첨부된 성명서(서울대교구 정평위 성명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정부 여야 정치지도자 사용자 노동계 모두 평화적으로,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기를 바랍니다. 명동성당은 분명 종교적 의미에서 성역입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보장된 치외법권지역은 아닙니다. 이 곳이 성역으로 보존될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 모두가 이 자리를 성역으로 존중하고 사랑할 때 성역으로 보존됩니다.
정부가 법집행을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자리를 피난처로 삼는 이들도 성역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물리적 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의 폭력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를 타도하자느니 하는 폭언들이 명동성당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입니다. 자기와 뜻을 같이하지 않는 이들을 증오하고 미움을 선동하고 타도를 외치는 말의 폭력은 없어야 합니다. 농성중인 분들은 이 곳을 성역으로 존중하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할 때 이 자리가 성역으로 존중될 것입니다. 이 자리는 평화 사랑 용서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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