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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이 본 박영한의‘지상의 방 한칸’(다시 읽는 한국문학: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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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이 본 박영한의‘지상의 방 한칸’(다시 읽는 한국문학:10)

입력
1997.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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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삶의 상처속 영혼의 보석을 캐는 우리시대 작가의 초상…시간은 몸을 통해 흘러간다. 한움큼의 핏덩이에 불과한 몸은 시간을 삼킴으로써 종식을 시작한다. 이 종식은 어느 굽이에 이르면 소멸을 향해 방향을 튼다. 하지만 몸은 소멸을 보지 못한다. 그저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이 느낌은 몸에게 그리움을 심어준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나의 그리움 속에는 흐릿한 풍경처럼 떠 오르는 몇가지 이미지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궁핍이다. 궁핍은 흐릿한 풍경이 되어 지나간 시간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어린 시절에도, 소년시절에도, 청년시절에도 나는 궁핍했다. 궁핍한 정신은 늘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내 문학의 자양은 이 궁핍이었다.

박영한의 자전적 소설 「지상의 방 한 칸」에는 궁핍의 정신이 윤기 있게 흐르고 있다. 「지상의 방 한 칸」이란 소설을 쓸 수 있는 공간의 표상이다. 하지만 가난은 작가에게 좀처럼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84년 초봄 계간문예지에 발표된 이 중편소설은 「지상의 방 한 칸」을 찾아 헤매는 작가의 고단한 모습을 눈에 잡힐 듯 생생히 담고 있다.

당시 내 머리 속에는 육중한 관념의 덩어리가 정제되지 않은 채 빙산처럼 차가운 바다를 떠돌고 있었다. 그 차가운 바다 위에서 나는 「지상의 방 한 칸」을 읽었다.

「그미는 잠든 아이를 안고 마루로 나갔다. 방이 단칸방이므로 원고를 쓰는 기간 동안이면 그미와 딸아이는 마룻바닥에서 기거해야 했다」

가난이 만들어내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은 세상에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죽은 아이의 죽음에 이르러 마침내 울음을 뱉어낸다.

「아이가 돌아오면 입힐 거라고 이것저것 배내옷을 챙기며 좋아하던 아내는 아이의 죽음을 알고 난 뒤 심심찮게 눈물을 글썽였다. 잠을 자다가도 기이한 울음소리에 눈을 떠 보면 그미는 어둠 속에 웅크려 있었다. 아이는 다행히도 제 아비를 닮지 않고 외탁을 했던 것인데, 1초도 안되는 동안 잠깐 본 그 아이의 오목조목한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그미에겐 잘 보이는 모양이었다」

「지상의 방 한 칸」은 결이 다른 두 개의 실로 교직되어 있다. 가난과 상처로 이루어진 실과 창작의 산고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향기의 실이 그것이다.

「작업에 충분히 몰두한 날 아침이면 마음껏 들이마신 그 황홀한 순간순간들의 아편에 취해 비틀거리며 방을 나오는데, 방금까지 내 내부에서 재조립된 사물과 언어들은 너무나 힘차게 싱싱해서, 금방이라도 내 뇌를 박차고 나가 끝없는 하늘로 내닫지나 않을까 싶은 조마조마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것들이 내지르는 아우성으로 머리 속은 비좁기 짝이 없고, 심장이 달근거리고, 그리고 나는 공복인 채 어질어질 아무 데나 쓰러지고 싶은 지경이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렇다, 소금에 푸성귀 잠재우듯 한 숨 푹 절여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전거를 몰고 둑너머 마을로 해장술을 마시러 내닫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매콤한 깍두기 해서 막걸리 몇 사발만 들이키면 그것들의 아우성은 단칼에 잠재울 수 있다」

작가에게 「지상의 방 한 칸」은 몸의 공간이자 정신의 공간이다. 정신의 바다에서 관념의 얼음덩어리를 향해 마른 칼질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던 나에게 「지상의 방 한 칸」은 참으로 상큼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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