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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와 설득의 러시아 정치/이진희 모스크바특파원(특파원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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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와 설득의 러시아 정치/이진희 모스크바특파원(특파원 수첩)

입력
1997.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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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람들에겐 바쁜게 없다. 좋게 말하면 여유가 있고 나쁜 의미로는 게으르다. 이에 불만을 터뜨리는 외국인들에게 그들은 「에타 러시아」(이게 러시아)라는 말로 대륙적 기질을 은근히 과시하거나 70년간 계속된 공산주의에 화살을 돌리기도 한다.굳이 「조국전쟁(나폴레옹 침공)」이나 「대조국전쟁(히틀러 침공)」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러시아의 이같은 기질은 지난해 7월 대통령선거 결선투표 때도 나타났다. 서방의 주요 언론들이 옐친 대통령의 사망설 혹은 위독설을 급하게 타전하며 그의 유고를 우려했지만 유권자들의 반응은 딴판이었다.

TV인터뷰에 응한 한 중년남자는 『대통령의 과음과 이에 따른 건강이상이 어제 오늘 이야기냐』는 투였고 주변의 러시아인들도 『좀 더 두고보자』는 태도여서 무감각과 무신경을 과시했다. 그러나 이는 흔히 말하는 정치적 무관심과는 전혀 다른 러시아인 특유의 여유다. 사망이 공식 확인된 후 서둘러도 늦지 않다는 느긋함이다.

97년 새해 예산안을 심의하는 국가 두마(하원)도 마찬가지였다. 공산당등 야당측은 민생안정을 위해 세출규모를 당초 예산안보다 40조루블(약 6조480억원)이상 확대하지 않을 경우, 새해 예산안을 승인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정부는 세출을 늘릴 경우 재정적자폭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정부 여당과 야당은 12월 중순까지 팽팽히 맞섰고 연말까지 예산안 통과가 불가능하리라는 위기감이 고조됐다. 연금 및 임금의 체불사태로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긴박했지만 하원은 느긋했다.

급기야 정부는 96년 4·4분기 예산규모로 새해 국가살림을 꾸려갈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동시에 야당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심장수술후 요양중이던 옐친 대통령도 공산당출신의 겐나디 셀레즈노프 하원의장 등과 만나 협조를 구했다. 양측의 끈질긴 줄다리기 끝에 당초안보다 30조루블이 늘어난 세출 529조루블 규모의 새해 예산안이 지난해가 저물기 직전 통과됐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러시아하원의 태평스러움은 작금의 한국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야당이 결사 반대해온 안기부법과 새 노동법을 새해가 시작되면 모든게 끝나기라도 하듯 여당의원만으로 날치기 통과시키는 여당의 무모함과 조급함이 대비되는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총파업에 돌입하는 노동계의 대응도 50보 100보일 수 있다. 법안 통과가 여의치 않으면 그에 맞춰 국정을 꾸려나갈 대책을 세우고 반대세력을 설득해 동참시키는 여유나 자신감이 없는 정부여당이나 「눈에는 눈」이라는 식으로 총파업에 들어가는 노동계 모두 좀 더 먼 앞날을 내다보는 자세가 부족한 것 같아 안타깝다.

지난 수십년간 이룩한 고도성장의 후유증이랄 수 있는 우리의 조급함은 이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답게 바뀌어야 한다. 우직하지만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소의 해를 맞아 「뛰는 토끼보다 기는 거북이가 빠르다」는 우화를 상기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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