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어렵다』는 얘기는 이쪽의 체면을 배려한 말일테고, 실은 『무슨 얘기를 횡설수설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 진심인 걸로 느껴지는 독자의 반응이 있어서, 지난번에 이 칼럼을 통해 소개한 탤보트 미 국무부장관의 논문 「민주주의와 미국외교」를 좀 자세히 설명해 보고 싶다.민주주의는 특히 최근 20년사이 세계 조류의 변화를 주도하는 지배적 이념으로 그 영역을 넓혀 왔다. 74년 민주국가가 전세계의 30%에 불과하던 것이 지금은 61%에 달한다. 인구비율로 보면 인류사상 처음으로 세계인구의 절반 이상인 54%가 민주체제를 향유하게 됐다.
이처럼 민주화가 급속히 확대된 이유의 하나는 정보통신기술의 혁명적 발전에 있다. 처음에는 라디오로, 그 다음은 TV, 팩시밀리, 전자 메일로 전파된 민주혁명의 소식은 아무리 견고한 국경선도 결코 저지할 수 없었다.
다른 나라가 얼마나 더 잘 사는지도 누구나 알게 됐다. 두번째 이유는 바로 그 경제발전에 있다. 사람들은 소득이 높아지면 거기에 걸맞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게 된다. 국제경제는 지난 20년간 비약적으로 번영했고, 각국의 민주적 시민집단도 함께 성장했다.
탤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민주주의 통치형태는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다른 시스템에 비해 훨씬 우수한 제도임이 분명하다. 민의가 선거를 통해 정치에 반영되고, 그런 민주국가끼리는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세계는 지금 재화나 서비스 뿐아니라 테러 마약 조직범죄 질병 환경악화의 원인과 그 결과까지 국경을 넘어 거의 무제한으로 이동하는, 상호의존의 시대에 살고 있다. 다른 나라의 통치형태는 당연히 미국의 이해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따라서 민주정치와 시장경제로 변혁을 원하면서도 난관에 봉착한 국가를 돕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 만이 아니라 미국인이 소망하는 안전과 번영의 국제환경을 실현하는 일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타국의 통치형태를 민주적으로 변화시키는데 개입한다는 미국의 이 외교원칙이 북한과 중국, 동아시아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에 있다. 존 도이치 미 중앙정보국장은 얼마전 김정일체제가 어떤 과정을 거치든 2∼3년 안에 끝날 것이라고 관측한 바 있다. 그것이 현실화하든 어떻든 그의 이 발언은 적어도 미국이 그 방향으로 시간표를 만들어 놓고 움직이고 있음을 암시한다.
보잉과 맥도널더글러스의 합병은 민간항공기 생산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 배경에는 미국 행정부의 의도적 조종이 있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하고 있다. 전투기를 포함한 첨단 군사항공장비의 생산비용을 낮춰 미국의 개입주의 외교를 대량파괴력으로 뒷받침한다는 전략이다.
만일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북한의 통치형태를 민주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미국의 외교·군사정책 목표라면, 이에 대한 우리의 준비는 무엇이어야 할 것인가. 무엇을 위한 통일이며, 어떤 형태의 통일인가. 통합인가, 병존인가. 위기에 대처할 우리만의 군사력은 확보돼 있는가. 평화회담에 임할 우리의 입장은 무엇이며, 양보할 수 없는 권리를 지킬 확실한 신념은 있는가.
이 모든 물음에 대한 해답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외교·안보장관의 머리를 호주머니에서 밤톨 꺼내듯이 갈아치우다가는 원칙이고 전략이고 신념이고 일관되게 지켜낼 재주가 없다. 주변 관련국들이 헛갈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국민부터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새 대통령이 누가 되든 제발 이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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