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MBC TV 문화특급 망년회 자리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배우 윤정희씨 부부를 만났다. 「올해의 예술가상」을 받은 백건우씨는 기분 좋게 즉석연주를 했는데, 운좋게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그의 연주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그의 연주는 소문대로 환상적이었다. 두 팔에 체중을 실어 부드럽게 밀어 버리는 것 같았는데 피아노 건반에서는 다양한 음향이 물보라처럼 쏟아졌다. 무엇보다 백건우씨의 표정이 기가 막혔는데, 음률 하나하나에 느낌을 실어내는 그의 표정연기(?)는 가히 일품이어서 「저 양반이 마누라한테 연기지도를 받지 않았나」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백건우 윤정희씨 부부를 캐스팅해서 연극을 만든다면?
그렇잖아도 요즘 장르를 넘나드는 크로스 오버 열풍이 국내에 수입되고 있고, 뉴욕 뒷골목의 양아치 연극 「스텀프」가 국내 팬들을 현혹시키면서 떼돈을 긁어갔다는데, 나라고 가만 있을 수 있나. 당대의 여배우 윤정희씨가 제 남편 들러리나 서고 다닐 팔자도 아닌 바에야 한번 꼬드겨 볼만 하지 않는가.
이번에는 당신이 나를 위해서 연극무대에 좀 서 달라고, 그렇게 해서 요즘 관객이 줄을 선다는 모노드라마의 주역으로 윤정희씨를 들여 앉혀 놓고 그냥 담담하게, 혹은 격정적으로 윤정희씨의 속사정을 구구절절한 고백체 화법으로 풀어 놓는 것이다. 그러면 백건우씨는 간간히 아내의 고백을 들으며 또 자신의 심정을 피아노 선율에 실어 화답한다면, 말과 선율, 연극과 음악은 정답게 충돌하고 심정도 주고 받으면서 저녁 한때를 격조있게 매료시킬 것이 분명하다. 이름하여 「윤정희와 백건우의 멋진 크로스 오버」. 「스텀프」보다 오히려 우리 정서에 맞는 고급 문화상품으로 안성맞춤 아닌가.
이런 생각을 말하려다가 그만 목구멍에 걸려 뱉아지지는 않았다. 「얼마나 연극 관객이 안들었으면 연출가 양반이 그 따위 낯 부끄러운 상업적 전략을 구사하느냐」는 핀잔을 들을 것 같아서 그만 둔 것이다. 그러나 수입 엔터테인먼트 문화상품에 우리 공연예술이 다 넘어질 판이다. 올해는 어떻게든 이달의 예술가, 올해의 예술가 할 것 없이 힘을 모아서 한국 토종예술이 건재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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