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민주주의 발판 노동관계법 손질/성급한 밀어붙이기로 대규모 파업 초래1987년의 노사 대분규를 겪은지 꼭 10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거센 분규의 파고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87년 당시 어떤 대기업의 경영자는 『천지가 개벽하는 줄 알았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그 대가로 우리는 「천지개벽」 대신 「민주화」라는 귀중한 선물을 얻었다. 그런데 현정부의 민주화개혁에서 가장 소외된 부문이 노동분야라는 점은 아구가 잘 맞지 않는다.
권위적 억압이 강할수록 노동운동의 민주적 저항력은 더욱 커지며, 노사간 상호존중이 산업민주화의 전제라는 사실이 87년의 뼈아픈 교훈이라면, 97년의 쟁점은 그보다는 한 차원 높은 것이기를 바랐다. 적어도 작년 5월 노사관계개혁위원회가 가동될 당시만 해도 국민은 지난 10년의 성숙이 미래지향적 결실을 맺기를 진정으로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87년의 일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파업은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기에 자제하는 것이 낫다는 점은 자명하다. 더욱이 경기침체, 무역적자, 저성장의 악재에 시달려온 요즘, 파업은 일종의 공포로 다가올 정도이다. 그러나 파업위기를 극복하려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온 파업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우선 파업은 흔히 비난하듯 집단이기주의의 표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집단이익은 조직형성의 필수요건이며 이 점에 있어 자본도 예외는 아니다. 파업은 오히려 집단이익 추구의 통로가 비합리적으로 차단된 것에 대한 시정의 요구이다.
둘째 파업은 단기적으로는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 그러나 노사 중 어느 한쪽이 흔쾌히 수용하지 않는 형태의 성장은 장기간 지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일시적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장기지속의 효율적 제도를 창출하는 것이 보다 현명하다. 파업은 잘못된 관행을 수정하고 노사간 대립을 해소하는 조율창구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파업은 없는 것이 백번 낫다. 그러나 파업에 대한 국민적 고정관념과 성장우선주의적 사고를 바꾸지 않고서는 이번의 파업을 발전적 기회로 전환시키지 못한다.
선진국의 예에서 보듯이 노사합의는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더욱이 양질의 노동을 통하여 세계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고도 여전히 「반노동주의」로 무장해 있는 한국사회에서 노사합의는 애초부터 난항이 예상되는 것이었다. 협상결렬의 책임은 우선 노사가 져야 한다. 그러나 더 큰 책임은 노사협상이 불과 몇개월 내에 완결되리라고 서둘렀던 정부에 있다. 밀실협상이라면 몇개월로도 족할 것이지만 기업생존과 노동자의 생계가 걸린 작업장의 쟁점들과 산업민주주의의 발판을 마련하는 노동관계법의 대폭적 손질에 대하여는 좀더 많은 인내심과 아량을 보여주어야 했다.
정부의 성급한 「밀어붙이기」는 노사합의의 기본요건인 상호신뢰를 일시에 제거해 버렸다. 선진국의 노사합의에서 정부는 다만 협상의 환경을 제공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적극적 조정자로 행위한다. 집단이익이 첨예하게 상충하는 시점에서 필요한 「조정의 정치」는 노사가 걸머진 짐과 위험부담을 덜어주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정리해고제와 변형근로시간제와 같은 것들은 실직, 재고용과 재훈련, 실질임금의 보전을 위한 공공복지제도가 전제되지 않으면 성사되기 어렵다. 이런 부담을 노동자와 기업에 전가시킨채 아무런 비용을 들이지 않으려 했던 정부의 안이한 발상에 파업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7년의 한국 노동계는 10년전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리더십과 조직기반이 놀랄만큼 단단해졌고, 단위조합에 대한 정상조직의 통제력도 강해졌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경제력을 좌우하는 대기업과 국민생활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공익사업장이 거의 조직화해 있다. 권위적 억압의 대가이겠지만 이제 한국의 노동운동은 크게 성장하였으며 국가경쟁력 향상의 튼실한 동반자로 자라났다. 지도부를 잡아넣으면 더 강한 지도부가 생겨난다. 노동의 진취적 에너지가 파업에 소모되지 않게끔 성숙한 조정의 정치가 필요하다. 이 민주화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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