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가 한 마리 살았다. 사자는 서커스단에 들어갔다. 사자는 수개월 동안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드디어 불이 활활 붙은 링 사이로 빠져나가는 재주를 익히게 됐다.다른 한 마리의 사자가 서커스단에 전입해왔다. 훈련을 한 사자가 새로 온 사자에게 자랑했다. 『내가 드디어 조련사를 훈련시키는데 성공했어. 잘 봐. 내가 저 불붙은 링을 지나가기만 하면 조련사가 나에게 고기를 주도록 길들였다구』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자」들이 많다.
우선 정부가 그렇고, 정치인이 그렇다. 국민에 의해 만들어지고 국민에 얹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국민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고 생각한다. 더 나가서는 끌고 다니려고 욕심을 부린다. 개인의 생각과 희망사항을 대세나 여론, 국민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합리화한다. 멀리는 6·29선언의 주체시비에서, 가까이는 노동법 안기부법의 국회 날치기통과에서 「사자의 우」를 본다.
노동법 개정과 총파업을 둘러싸고 검찰과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여론 업기 줄다리기」도 그렇다.
검찰은 노조지도부를 구속하는 것이 파업을 잠재울 수 있으며 국민을 위하는 길이라고 여긴다. 사용자는 이미 확정된 노동법을 사수해야만 국민이 잘 살 수 있다고 여긴다.
노동자는 사용자가 지키려는 것을 분쇄해야 국민이 행복해진다고 여긴다. 모두가 「일반사람들」에게 유리하게 보이기 위해 명분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정부와 사용자와 노동자를 제외한 일반사람들이란 누구인가. 누구의 여론을 업겠다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나와 너 사이에도 「서커스단의 사자」는 많다. 스스로의 판단과 잣대만으로 주변을 대한다. 그러다보니 많이들 다투게 된다. 사자야 기어다니니까 멀리 못 봐서 그렇다치고, 우리는 서서 다니는 만큼 사자보다는 좀 더 멀리 봐야 하지 않겠는가. 새해에는 조금 멀리 조금 넓게 보자. 『넓게 보면 세상이 변한다』는 어떤 와이드TV의 광고문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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