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으면서 3당 영수들이 신년휘호로 각자의 포부를 밝히고 있다. 우리 정치지도자들의 신년휘호의 관행은 짧은 몇마디 글자로 긴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서 유용하다.신한국당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은 「유시유종」을 내세웠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뜻이다. 국민회의의 김대중 총재는 「실사구시」. 공론 대신 사실을 토대로 객관적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태도를 말하는데, 경제를 비롯한 새해의 국가적 난제들을 과학적 합리성으로 해결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한다. 발톱은 살짝 감춘 자세다. 이에 비해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의 「줄탁동기」는 좀 다르다. 닭이 계란을 품고 부화할 때 안에서 병아리가 껍질을 쪼는 것과 밖에서 어미닭이 껍질을 쪼는 것이 때가 같다는 뜻으로, 선도에서 기봉이 양자 상응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야심이 엿보이는 문구다.
대통령선거의 해를 맞은 각자의 저의는 접어두더라도 이 가운데 아무래도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올해가 사실상 임기의 마지막 해인 김대통령의 신년휘호다. 그래서 「유시유종」 넉자의 함의는 자꾸 씹어 볼 만하다.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음이 있고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끝이 있으니 이것은 자연의 도리다(유생자필유사 유시자필유종 자연지도)」라는 말은 한대의 유학자 양웅이 「논어」를 본떠 지은 「법언」에 나오는 구절이지만, 이 책은 무욕 심정한 생활을 하던 저자가 성인을 숭앙하면서 도덕정치를 논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 한마디 속에는 왕도가 들어 있다.
또 「논어」에서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사람은 성인뿐이다(유시유졸자 기유성인호)」라고 한 것은 군자는 본말을 구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왕에 고언을 더 들먹이기로 하자면, 「역경」은 「군자는 끝이 있다(군자유종)」고 했는가 하면 「진서」에는 「소인은 시작은 있되 끝이 없다(소인유시무종)」는 말이 나온다. 「시경」에서도 「시작이 없는 것은 없지만 끝까지 잘 되는 것은 드물다(미불유초 선극유종)」라고 했다. 요컨대 유종자는 군자요 무종자는 소인이라는 평가다.
영국시인 T.S. 엘리엇의 장시 「4개의 4중주」는 제2곡인 「이스트 코커」의 시구와 종구가 유명하다. 이 시장은 「나의 시작속에 나의 끝이 있다(In my beginning is my end)」로 시작되어 「나의 끝 속에 나의 시작이 있다(In my end is my beginning)」로 끝난다. 이렇게 모든 시작은 끝을 함유한다. 그리고 끝은 시작을 내포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끝이 있다면 시작도 있었다. 취임은 퇴임을 망견하고 퇴임은 취임을 수구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새해를 맞아 이제 취임 당시의 초심을 되새겨 볼 때다. 대통령선거 기간동안의 많은 공약들은 일일이 들추고 있을 겨를이 없다손 치더라도 대통령으로서 첫날의 첫마디인 취임사를 다시 읽어보자.
김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신한국의 창조를 선언했다. 『우리 후손들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자랑으로 여길 수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신한국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한국병을 앓고 있습니다』라면서 한국병의 치유를 다짐했다. 또한 개혁을 주장하면서 세가지 당면과제를 제시했다. 첫째 부정부패의 척결, 둘째 경제를 살리는 일, 셋째 국가기강을 바로 잡는 일.
지금 과연 조금도 더듬거리지 않는 어투로 이 취임사를 다시 당당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을까. 개혁의 당면과제는 어느 것이 실천되었는가. 한국병은 더 도지지 않고 말끔히 나아졌는가. 오늘의 우리나라가 후손들이 태어난 것을 자랑으로 여길만한 신한국인가.
새해 정초는 덕담의 가절이다. 신한국 건설이 어찌 단대의 과업이겠는가. 그리고 5년 임기의 마무리를 위해서는 이제 한해밖에 남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직 한해나 남았다. 마지막 한해에 다시 새로운 희망을 건다. 김대통령이 유종자이기를 기대한다. 이것이 「유시유종」의 참뜻이다.<본사논설고문>본사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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