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더니즘의 광풍이 지난후 PC통신·영화로 우리곁에 온 컬트문화/그러나 아직도 정체는 불분명한데…세기말 우리 문화의 키워드(Key Word)는 「컬트」다.
지금도 끔찍한 영화, 무서운 영화의 다른 이름으로 오인되곤 하는 「컬트」(원래 사전적 의미로는 평론가나 대중들에게 호평을 받지는 못하지만 일부의 애호가 층으로 부터 종교와도 같은 열광적 지지를 받는 문화를 의미). 컬트문화는 이제 90년대 우리 문화의 중심적 「담론」이 됐다.
80년대의 광풍 「포스트 모더니즘」이 지나간 자리에서 모래알 처럼 뿔뿔이 흩어진 문화 대중들에게 「컬트」는 이제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대항 문화 틀이기 때문이다. 시네마테크, 동성애, 컴퓨터 통신, 만화, UFO, 서태지….
고전적, 권위적 개념으로 볼 때 일탈문화 내지 하위문화에 불과했던 다양한 삶과 취향의 문제가 이제는 사회를 읽는 일차적 텍스트가 됐다. 물론 이러한 문화들이 「담론」이라는 고상한 이름을 뒤집어 쓰게 된 것도 다 탈권위를 지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덕분이다.
하지만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에는 「열광과 광기」가 배어있다.
영화 「이레이저 헤드」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에서 「가위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과 사회의 유형에 천착하고 이를 아우르는 혼종의 양식. 「압구정동-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TV-가까이 보기, 멀리서 읽기」 「최진실 신드롬」, 록가수 짐모리슨의 전기 「여기에서는 아무도 살아 나가지 못한다」, 신세대 문화론을 다룬 「신세대 네멋대로 해라」 등 다양한 문화각론서.
컴퓨터 통신은 컬트문화의 가장 권위있는 매체이다. 가상현실 속에서는 죽은 비틀즈가 살아나고, 새로운 사회의 질서가 생긴다. 수많은 이야기 구조와 결말을 갖는 다차원의 「하이퍼 소설」도 컴퓨터 통신문화의 한 단면이다. 기존 신문들이 다루지 않는 영역들도 이곳에서는 톱 뉴스이다. 문화는 이제 텍스트의 내용이 아니라 수용자와 어떤 관계와 형식을 맺고 소비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 수용자 친화적 문화만이 살아남는다.
재미있는 점은 97년 한국 문화에 있어 컬트는 대항문화의 차원을 넘어 이제 그 자체가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새로운 신화는 언제나 소비스타일과 연결돼 있다. 컬트 영화도 이름이 알려진 것에만 관객이 몰린다. 개인 취향의 정당성을 담보로 하고 있는 「컬트」의 진정한 정신은 사라지고 「컬트 영화의 소비」만이 있을 뿐이다. 영화잡지를 끼고 시네마테크에 들락거리지만 다수의 「그들」이 열광하는 것은 평론가 추천 컬트 영화들이다.
결국 90년대 말 한국의 컬트문화는 그것의 속성을 재빨리 간파하고 상업화해 낸 문화 상업주의와 「컬트」라는 새로운 권위에 복종하는 문화대중의 틈새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그게 현실이다.<박은주 기자>박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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