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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김질하는 자세로/이병일 논설위원(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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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김질하는 자세로/이병일 논설위원(메아리)

입력
1997.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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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한자능력협회는 96년 한해 일본의 세태를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한자로 「식」자를 뽑았다. 후생성 사무차관이 검은 돈을 받아 먹은 혐의로 기소되는 등 공무원 사회의 부패가 절정을 이룬데다 「O―157」이란 병원성대장균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고생을 했다는 것 등이 이유였다.신년초부터 떨떠름한 이야기지만 우리도 96년을 돌아보며 이같은 선정을 한다면 어떠한 한자가 적절할까. 장관과 장관부인이 구속되는 등 부패도 심했지만 「식」자는 일본이 선택했으므로 제쳐놓자. 북한의 도전이 미친듯 계속되고 국회의원 등이 탈당하고 날치기 파업이 뒤를 잇는등 모든 것이 정신없이 춤을 춘 상황에서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광」자가 아닐까.

북한은 잠수함 침투란 전례없는 도발을 감행하고도 뻔뻔스럽게 백배 천배 보복하겠다고 협박하는 등 그들의 광기를 서슴지 않고 드러냈다. 사건발생 100여일만에 마지못해 「유감」이란 사과 아닌 사과를 했지만 이번 유감표명으로 북한의 광기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과소비를 하고 해외나들이에 열을 올린 것이 바로 우리다. 백화점에 들어가 보면 국산품 찾기가 힘든 「외제광란극」이 펼쳐지고 있다. 관광수지 적자가 16억달러에 이른다고 해도 행여 질세라 해외로만 머리를 돌리고 돌아올 땐 외제물품으로 가방을 채우고 있다. 이러한 풍조는 연초 연휴바람을 타고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총체적 불안을 상징적으로 말해준 것이 유사종교의 「광란살인극」혐의다. 이는 우리사회의 가치체계가 혼란에 빠졌음을 뜻한다. 땅마저 「광기의 한해」를 장식하듯 연이은 지진으로 우리들 마음을 미친듯 흔들고 지나갔다.

소의 해인 정축년 새해는 어떨까. 안타깝게도 경기전망은 지난 해처럼 어둡기만한데 사회에 몰아치는 광풍은 조금도 누그러질 것 같지가 않다. 올해는 더욱이 대통령선거란 「열병」마저 도사리고 있다. 선거는 꼭 치러야 할 축제라지만 그 열기가 지나치게 높아 앞날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조짐은 나타난지 오래다. 때아닌 탈당바람속에 구태의연한 날치기가 등장하고 파업이 이를 받쳐 분주한 세모를 더욱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탈당인사들의 시덥지않은 변명도 그렇지만 정계의 「꼬락서니」를 보면 울화통이 치밀어 미치고라도 싶은 것이 국민들의 심정이다.

「대권」이란 말만 들어도 이성을 잃은듯 미친듯 제 갈길을 가버리는 것이 여야당의 고질병이다. 대통령선거의 해를 맞아 이 병이 더 깊어질 것은 뻔한 일이다. 연말에 보여준 힘 겨루기가 계속되는 틈바구니속에서 몸살하는 것은 국민들 뿐이다. 올 1년 보낼 일을 생각하면 걱정이 태산같다.

이 때문인지 쉽게 광기를 부리지 않고 바위처럼 행동이 무거운 소가 새해엔 새로운 의미를 갖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소는 잊고 살던 고향을 일깨워준다. 해질녘 들일을 마치고 황금햇살을 받으며 돌아오는 소에게서 느꼈던 안정감과 평화로움을 되찾는 일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다.

소의 행동엔 가식이나 화려함이 없다. 오히려 유순함이 지나쳐 우직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멍에를 지고 콧김을 내뿜으며 묵묵히 걷는 모습은 바로 순교자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특히 정치인들이 소에게서 꼭 배워야 할 점은 이러한 인내심과 끊임없이 반복하는 반추, 즉 새김질하는 자세다.

올 한해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선거열풍이 아니더라도 파업이란 시한폭탄이 벌써부터 꿈틀거리고 있다. 억지 사과를 한 북한의 도발도, 검은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는 경기와 물가도 걱정이다. 이런 때 일수록 지난해와 같은 「광기」가 우리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각오를 새로이 해야만 한다.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남에게 배려하는 새김질하는 자세로 97년의 항해를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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