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뜻하지 않은 독감에 걸려 며칠간을 자리보전하여 누워 있었다. 세상이 독해져서 그런걸까, 바이러스라는 놈도 여간 독해진 것이 아니어서 약을 한주먹씩 먹고도 사나흘 동안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연말이면 벌어지는 저 고질적인 망년회를 대충 벗어날 수가 있었지만 못된 친구들은 내가 칭병이나 하는줄 알고 투정이 보통 아니다.그럭저럭 열이 잡혀갈 무렵, 오랜만에 내가 살고 있는 경기 성남시 분당구 목련마을 앞 맹산에 있는 약수터를 찾아 휘적 휘적 올라갔다. 그 약수터 올라가는 길에 내가 「세우내」라고 이름을 붙여준 실낱같은 개울이 있다. 민물새우같은 것이 살 정도로 깨끗한 개울이라는 뜻도 있고 근심을 씻어버리는 개천이라는 뜻도 된다. 거기서 잠시 한숨을 돌렸다가 올라가면 약수터가 나오는데 아침에 올라가면 언제나 나 혼자다. 그곳의 작은 공터에서 소리도 한 번 질러보고 단전을 가다듬기도 하지만 큰 전나무에 몸을 기대고 서서 하염없이 겨울 숲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다. 겨울 숲에는 겨울나무들이 있다. 잎새를 다 떨어내 버린채 발가벗은 몸으로 속살을 훤히 다 보여주는 겨울나무들. 살을 잘 발라내고 남은 흰 생선뼈 같은 나무들이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며 서있는 풍경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나는 언제나 그 겨울나무에게서 생의 어떤 겸손함과 경건함 같은 것을 배운다. 청춘의 무성한 잎새를 자랑하는 여름나무완 격이 다르다.
이 세상에는 분노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특히 지난 한해는 온통 우울하고 분노로운 기억들 뿐이다. 만일 우리에게도 「통곡의 벽」 같은게 있다면 한바탕 목놓아 통곡하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겨울 숲은 자신의 가난한 모습으로 그런 내게 위안을 준다. 그리고 좀 더 겸손하고 인내하라고 가르쳐준다. 그 겸손은 남에 대한 겸손 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생에 대한 겸손함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시간은 어쨌든 뒤로 돌아가는 법은 없다. 짧은 시간으로 보면 역사는 후퇴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길게 보면 분명히 진보해 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덧 뿌연 어둠을 헤치고 겨울나무들 사이로 밝은 햇살이 화살처럼 퍼지고 있다. 새해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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