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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의 추운 겨울/김귀영 풀무협동조합 간사(1000자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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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의 추운 겨울/김귀영 풀무협동조합 간사(1000자 춘추)

입력
1996.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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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상(추곡수매) 해봐야 연말에 이자 갚고 나면 뭐 남는게 있어야지』 한 사람이 말을 건네기가 무섭게 속사정 이야기들이 나온다.『자넨 빚이 얼만가』 『8,000만원이나 돼』 『에이, 그 정도라면 말도 꺼내지 말게. 난 억이 넘는다구, 억』 『요즘 농사지으면서 빚이 1억 넘지 않으면 진짜 농사꾼이 아니라던걸』 『그래도 자넨 땅도 있고 나라에서 하우스 자금도 지원해서 특수작물이라도 하잖아』 『농산물 가격이 보장돼야지. 나같은 놈이 어디 한둘인가. 시설채소나 과일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니 가격이 폭락해서 겨우내 석유장사들만 돈벌이 시키는 꼴이지 뭔가』 『그래도 소는 좀 낫지』

몇년전부터 젖소에 손을 대 사는게 넉넉해 보이던 아저씨가 말한다. 『진작 봄에라도 다 팔아 치울걸. 소값 우유값 떨어질 줄 뻔히 알면서도 뭘 믿고 붙잡고 있었는지』 『아 누가 뭘 믿어서 붙잡고 있나. 빚 얻어 축사 개조하고 공들여 놨으니 설마 설마하며 지내다보니 이 꼴 난거지』 『그럴줄 알았으면 돼지나 키울걸. 돼지값은 아직까지 괜찮던데』

『다 사료장사 돈 벌어주는거지. 올해만 해도 사료값이 두번이나 올랐다구. 이자 주고 사료값 주고 생활하다 보면 빚은 못 갚고 돈도 안돼』 『진작 눈 밝을 때 농사 때려치는건데. 배운 도둑질이 이거라서』 『난 땅 팔고 소 다 팔아도 빚 청산 어림없어』 『빚 대신 땅이라도 주고 싶어도 어디 빚 대신 땅을 받아주기나 한다더냐구. 쓸모 없는 땅』

술까지 한두잔 건네가며 답답한 속내를 들추다가도 어느 단계에선 서로 함구하며 슬쩍 화제를 돌려버리고 만다. 이들 가까이서 이런 얘기를 듣는 요즘, 난 불안하다. 벼랑 끝에 서있는 심정이 된다.

매상한 날이라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자식들에게 줄 과자며 과일을 한 보따리 사서 돌아가는 농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년 봄, 날 따뜻해지고 아지랑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하면 누구보다 부지런히 땅으로 달려가 뜨거운 땀방울을 쏟아낼 그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빚은 못갚고 살지만, 내 살같은 땅을 놀릴 수는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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