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세밑 선물목록 1호로/60∼70년대 동양화서 90년대 아트캘린더까지/시대와 함께 사회와 함께 세월을 건넌 ‘추억의 이력서’/올해도 제작량 국민 한명당 2부꼴/그러나 전자수첩 등에 밀려 21세기엔 살아남을 수 있을런지…세밑이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지인들에게 연하장을 띄우고, 새 수첩에 중요한 연락처며 전화번호들을 옮겨 적을 때다. 그리고 벽 한 구석에, 책상 머리맡에 덩그마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묵은 달력을 바꿔 달 때다.
달력. 달력만큼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을까. 세밑에 달력을 바꿔 달며 세월의 무상함에 잠시 감상에 젖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달력을 넘길 때는 지난 한 해를 반추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후회와 다짐을 한다. 지난날에 대한 회한과 앞날에 대한 포부가 교차한다. 보람찬 나날을 보낸 사람에게는 포부가, 삶의 무게에 지친 사람에게는 회한이 먼저 찾아올 것이다. 그래서 달력은 우리의 삶과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자 자화상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돌돌 만 달력 뭉치를 겨드랑이에 끼고 귀가를 서두르는 모습은 낯익은 세밑 풍경이었다. 신정에 고향 부모님께 내려갈 때도 잊지 않아야 하는 선물목록 1호였다.
그러나 요즘은 달력이 흔해져서 굳이 따로 챙기는 사람이 별로 없다. 또 시스템 다이어리, 전자수첩 등 달력의 일부 기능을 대체하는 것들이 많아 달력의 수요가 그만큼 줄어들기도 했다. 촌스럽다고 벽에 걸지 않는 가정도 많다.
하지만 달력의 전성시대였던 60, 70년대, 달력의 쓰임새는 실로 무궁무진했다. 기업의 가장 효율적인 광고매체이자 저렴한 사은품이었고, 국회의원들의 선전수단이었다. 또 사람들에게 국정지표나 영농정보 등을 널리 알리기 위한 공익광고수단으로도 널리 활용되었다.
장식품이라고는 이발소 액자 그림 정도에 불과했던 어려웠던 시절, 일반 사람들에게 달력은 연말에 반드시 챙겨두어야 할 생활 필수품이자 인테리어 소품이었다. 특히 대기업이나 은행 등에서 발행한 「고급 달력」들은 연말 선물 품목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때는 광고매체나 기법이 다양하지 못해 언론에서 「캘린더 작전」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달력 제작은 주요 사안이었다. 그러나 달력을 둘러싼 경쟁과 이로 인한 제작비 과다 지출의 부작용이 사회문제로까지 불거지자 73년에는 시중은행들이 일제히 달력 제작 중단을 결의, 10여년이 넘도록 발행을 중단한 일도 있었다.
서울 을지로 3가에서 달력가게를 운영하는 박대섭(58)씨의 회고. 『지금은 개인적으로 달력을 사러오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개인 손님이 적지 않았다. 달력을 많이 나눠주는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던 시절이라 일부러 자기 돈을 들여 사는 사람들이 꽤 됐다』
그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달력이 달력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꼭 필요한 한두 개를 빼고는 포장지도 뜯지 않은 채 쓰레기통 속으로 직행하기 일쑤다.
그러나 달력은 여전히 살아 있다. 예전의 전성기를 구가하지는 못하지만 달력은 인쇄업계의 가장 큰 일감 중 하나고, 달력 제작철이 되면 종이값이 흔들릴 정도다. 국내 최대 달력 제작업체인 홍일문화사의 이종훈 기획부장은 올해 달력시장 규모를 7,000만∼8,000만 부에 1,000억 원 정도로 추산했다. 국민 한 명에 2부씩 돌아가는 엄청난 양이다. 재외교포들에게 가는 달력만도 300만 부나 된다. 그나마 불황 때문에 예년에 비해 20% 정도가 줄어든 규모다.
주목해봐야 할 것은 달력의 경제학뿐만이 아니다. 달력은 동시대인의 정서와 시대상황을 가장 예민하게 반영하면서 변천을 거듭해온 작은 역사책이자 풍속도다. 그래서 달력에도 유행이 있다.
60, 70년대 은행이나 기업체 등에서 주문제작한 달력은 동양화나 풍경사진 같은 「점잖은」 것들이 대종을 이루었다. 화장품회사, 의류업계 쪽은 유명 연예인이, 주조업체는 비키니·반누드 여인이 단골로 등장했다.
70년대에 큰 히트를 쳤고, 지금도 심심찮게 팔려나가는 「연예인 달력」은 그 자체가 우리 대중문화의 변천사다. 달력 모델은 연예인의 인기도를 가늠하는 척도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매체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에 그것은 대중들이 소유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스타 이미지였고, 브로마이드였다. 또 최신식의 패션과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는 가이드북이기도 했다.
달력계의 스테디셀러인 동양화 달력은 70년대 허백련 남농 허건, 80년대 운보 김기창으로 이어지는 대가급 동양화 그림을 선보이다가 최근에는 서양화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최근 가장 많이 팔리는 달력은 야생화, 초목 등을 담은 자연 시리즈물. 90년대 들어 부쩍 커진 환경에 대한 관심과 도시인들의 자연에 대한 동경이 반영된 현상이다.
계층별, 세대별, 성별, 직업 등에 따른 다양한 문화적 취향과 특성을 살린 달력들도 속속 선보이고 있다. 10대들을 주요 타깃으로 삼은 「팬시 달력」이 수십종씩 시중에 나와 있고, 「외국유명배우 달력」 「작품달력」 「족보달력」 「영화달력」 「건축달력」에, 심지어는 자기 모습이나 가족 기념일 등을 담은 「개인달력」 「가족달력」까지 제작된다.
21세기 최첨단 정보사회의 개막을 눈 앞에 둔 지금, 종이 달력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문화평론가 정윤수씨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1년 내내 걸려 있으면서 매일 한 번씩은 보고, 몇 천만부씩 대량복제되는 달력의 특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그는 말한다. 홍보효과만 보더라도 달력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매체라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또 달력의 문화·예술적 가능성에 대해서 좀더 적극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달력은 유명작가나 대가들의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작은 「안방 화랑」으로서, 뛰어난 복제미술적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석과 달리, 달력시장의 앞날은 그리 밝지만은 않은 것 같다. 높아진 제작비용 때문에 수지 맞추기가 점점 힘들어질 뿐더러, 적지 않은 수요를 차지하던 외국 바이어들도 홍콩, 싱가포르, 중국 등지로 거래선을 바꾸고 있다. 업체들의 달력 인심도 예전같지 않다. 사람들은 점차 달력을 보는 대신 호주머니속의 전자수첩을 신봉한다.
언젠가 12장짜리 달력은 박물관에 들어앉을 지도 모르겠다. 한 장씩 넘기며 후회도 하고, 다짐도 해보는 달력은 그야말로 20세기의 유물로 남을 지 모를 일이다.<황동일 기자>황동일>
◎세월은 가도 ‘아트캘린더’는 남는다/유명화가·사진작품 등 한정본 제작 소장용으로 인기
해 지난 달력은 어디에도 쓸 수 없는,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달력 자체만으로 소장할 가치가 있는 「아트 캘린더(작품달력)」가 있다.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달력의 본래 의미라면 아트 캘린더는 그 공식을 뒤집어 본 것.
아트 캘린더는 유명 화가나 사진 작가의 작품을 담는 것이 보통인데, 인쇄상태나 디자인 면에서 대량 인쇄해 배포하는 보통 달력과 질적인 차이가 있다. 아트 캘린더는 희소성을 중요시하는 예술 작품처럼 한정본으로 제작된다.
삼성문화재단에서 만든 달력은 대표적인 예이다. 삼성문화재단은 작년 마티스 재단에서 판화 원판을 받아 1만부 한정본으로 달력을 제작했다. 97년 달력엔 폴 클레의 그림을 담았는데 판화지를 사용하여 원화의 질을 살렸다.
신세계백화점도 94년부터 외국 유명 작가의 그림을 인쇄한 달력을 제작하고 있다. 94년엔 톰 웨셀만, 95년엔 후안 미로, 96년에 조르쥬 브라크, 그리고 내년 달력엔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담았다. 『단순한 기업 홍보용이 아니라 적극적인 고객 서비스라는 의도에서 제작했다. 그림이 어렵다는 반응도 있지만 반응이 좋은 편이다』 신세계 백화점 홍보실 관계자의 말이다.
최근 문학동네에서 나온 이철수의 판화 달력은 아트 캘린더의 새로운 영역을 보여준다. 출판사에서 달력을 제작한 것도 이채롭다.
『판화가 가진 인쇄성이 인쇄매체의 하나인 달력과 잘 결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1만 5,000 부 정도가 팔렸다』 이철수의 판화 달력을 기획한 문학동네 기획실 김철식씨는 출판의 영역을 넓힌다는 의미에서 내년에도 다른 형식의 달력을 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판화는 다른 미술 분야와는 달리 출판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달력과 같은 인쇄 매체에 많이 활용되고 있다. 판화의 대중화와 미술 감상의 일상화라는 측면에서도 달력은 가장 적합한 매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나화랑에서 매년 제작하는 달력도 넓은 의미의 아트 캘린더.
『연말이면 으레 들어오는 게 달력이라고 생각해서 사람들은 달력을 잘 사지 않는다. 하지만 아트 캘린더는 미술품을 감상하듯 두고 두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일반 달력과는 다르게 봐야 한다』 가나미술연구소 김명선 기획과장의 말이다. 가나화랑은 내년 아트 숍을 열어 외국의 아트 캘린더를 소개하고, 본격적으로 아트 캘린더를 제작할 계획도 갖고 있다.
외국에서는 달력이 이미 출판의 중요한 한 영역으로 인식되어 아트 캘린더와 같은 다양한 형식의 달력이 많이 제작된다. 서점에서 달력을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상의 문화를 만든다는 의미에서도, 달력이라는 매체의 가능성을 새롭게 바라본다는 측면에서도, 아트 캘린더의 제작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김미경 기자>김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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