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의 막장에는 세기말적 현상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19세기말 유럽 사상계를 휩쓴 비관주의였다. 당시의 지적 풍토를 지배한 것은 환멸, 좌절감, 불확실성이었다. 세계문명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는 비판론이 철학, 문학, 미술 할 것 없이 심지어 과학에까지 짙게 깔렸다. 이같은 이른바 「세기말」의 암울한 역사의식은 1차대전이 터진 후의 수십년간을 지배하는 정신계의 혼란을 알리는 조짐이었다. 서유럽의 일부 문인들은 인생의 적극적 가치를 부정하고 퇴폐적 도덕을 찬양하는 「데카당」이었다. 니체, 베르그송 같은 철학자들은 19세기의 낙관주의와 합리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이러한 지적 풍토는 20세기로 이어졌다. 1차대전 후에 가장 많은 독자들을 끈 슈펭글러는 「서양의 몰락」(1918)에서 서양문명이 쇠퇴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1차대전이야말로 서양의 몰락이 시작되는 사건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위기의식은 많은 다른 사상가들의 공감을 얻었다. 예컨대 스페인의 사상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대중의 반란」(1930)이란 저술을 통해 자유주의 문명의 쇠퇴와 대중화한 보통 사람들의 대두를 한탄한 바 있다.
그렇다면 20세기 말은 어떠한가.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은 질병, 기아, 분쟁으로 시달리고 있다. 세기의 불치병 에이즈의 대유행, 아프리카에서의 기아와 인종간 대살상, 마약사용인구의 세계적 증가, 오존층의 파괴로 인한 지구의 온난화 현상, 하천-해양의 수질오염과 자연환경의 파괴 등과 같은 부정적 요소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체험하는 또다른 세기말의 특성은 19세기 말의 경우와는 다르다. 무엇보다 특기할만한 것은 80년대부터 본격화된 정보혁명이다. 그것은 개인용 컴퓨터의 대중화에서 불이 당겨졌다. 72년 영국인 싱클레어에 의해 첫번째 혁명적 단계가 시작된 컴퓨터는 10년후인 82년에는 더 강력한 염가 기종으로 발달했고 이후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였다. 마침내 실리콘 집적회로의 출현으로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개발됨으로써 통신-전자 혁명의 시대에 박차가 가해졌다. 사무자동화에서 국방의 정보화에 이르기까지 멀티미디어는 공간과 시간에서 우리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고 있다. 실로 엄청난 정보혁명시대가 눈 앞에 와있는 것이다.
또다른 역사적 격변은 90년대의 자유화운동의 확산이다. 85년의 고르바초프의 집권으로 「글라스노스트」(개방) 및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의 정책이 본격화되고 마침내 89년 소련은 몰락했다. 이어 동유럽의 민주화혁명이 파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동독 호네커정권이 쓰러졌다. 결국 90년 동서 독일은 통일되고 이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에서 민주화는 가속됐다.
거의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에도 자유화운동이 일어나 정통성이 있는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그 결과 96년은 군사반란과 정권탈취로 일그러진 80년대의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한 해가 되었다. 그것은 아시아 뿐아니라 전세계의 자유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재판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재판이 주는 교훈은 정치적 후진국가에서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리는 경종을 울린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제 96년도 다 지나간다. 사람들은 2000년으로 21세기가 시작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80∼90년대의 정보화와 자유화가 21세기의 주류를 형성하는 세계사적 특성이라고 볼 때 21세기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이다. 밀레니엄이란 서력으로 1,000년을 말하며 21세기의 시작은 동시에 인류사의 세번째 밀레니엄의 시작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세기,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역사의식이다. 그것은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밝은 삶을 계획하는 역사의식이다.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시간이며 가능성의 세계이다. 이 가능성을 어느만큼 높일 수 있는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자각과 노력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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