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생… 고졸… LG 2군 포수/쌍방울 1년만에 쫓겨나는 아픔/불펜포수·테스트 통해 다시 2군 선수로/그러나 고달픔은 여전/훈련 또 훈련 파김치 될때까지/동료가 갑자기 안보이기 예사/“그래 실력만이 무기다 다신 실패말자” 다짐하지만…그의 이름은 윤승규. 프로야구 LG트윈스 2군 선수다. 75년생, 21세.
초등학교 시절에 야구를 시작, 서울 광영고 시절에는 고교 국가대표 상비군에 잠깐 발탁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93년 쌍방울 2군에 입단, 프로야구계에 발을 디밀었다. 포지션은 포수. 연봉 800만원.
가족들은 스타탄생을 기대했으나 1년만에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구단에서 쫓겨났다. 나름대로 할말은 있었다. 태어나서 줄곧 서울서 살아 온 탓에 생판 낯선 땅인 전주에서 지내게 되자 외로움이 밀려 들었다. 밤이면 부모님과 친구들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고 서울로 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하늘이 노래지는」 강도 높은 훈련도 견디기 힘들었다. 프로야구계의 핏덩이인 그에게 신경을 써주고 감싸 주는 선배는 없었다. 제 앞길 챙기기도 힘든 2군생활에서는 애초에 그런 기대가 사치였다. 훈련에 정신이 모아지지 않고 소록소록 집 생각만 피어 올랐다. 쫓겨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수시로 엄습했으나 좀체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마땅히 한 일도 없이 연말을 맞았다. 선수와 구단간의 계약갱신이 이뤄지는 시기였다. 설마했으나 구단은 한마디로 『나가라』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이대로 야구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것인가. 눈앞이 캄캄했고 부모님의 실망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한편으로 홀가분한 마음도 있었다. 객지 생활이 너무 고달팠기 때문이다. 절망과 묘한 해방감을 동시에 느끼며 짐을 싸 서울로 올라 왔다.
그러나 해방감은 잠시뿐이었다. 막상 서울에 와 보니 앞길이 막막했다. 무엇 하나 할 일이 없었다. 실업자를 바라보는 가족과 친구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초등학교때부터 10여년을 바쳐 온 야구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참담했다. 배운 것이라고는 야구뿐인데…. 남들처럼 제대로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막노동 빼고는 밥벌이 방법이 막막했다.
다시 야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쳤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절망의 늪속으로 점점 깊이 빠져 들었다. 우울한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날 마음을 추스르러 잠실야구장으로 달려 갔다. 텅빈 겨울 야구장은 썰렁했다. 「야구만이 살길」이라고 허공을 향해 몇차례 외쳐 보았으나 좀처럼 답답증이 풀리지 않았다.
지난일들이 되살아 났다. 그때 잘할 걸 왜 그랬을까.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밤이 이슥해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새벽녘에야 선잠이 들어 관중들이 환호하는 야구장에서 홈런을 때리고 스타로 떠오르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용기를 냈다. 찌뿌드드한 몸을 이끌고 LG 구단사무실 문을 무작정 두드렸다. 구단측은 약력을 검토하고는 정식 선수는 안되겠다고 했다. 그러나 『불펜포수도 괜찮다』고 끈덕지게 졸라 승낙을 받았다.
불펜포수는 투수의 연습 피칭때 공을 받아 주는 역할로 심부름꾼이나 다름 없었다.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젊으니 끊임없이 노력을 하다 보면 기회가 생길 수 있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94년 시즌 내내 불펜에서 「하늘같은」 선배 투수들의 공을 기계처럼 받았다. 유니폼은 입었지만 선수도 아닌 자신이 이상한 존재로 느껴졌다. 쌍방울에서 좀더 열심히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지만 각오를 새로 다졌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하면 된다』
필사적으로 재기의 노력을 시작했다. 언제고 경기 시작 수시간 전 구장에 들어섰다. 연습 욕심 때문이었다. 경기가 끝나면 뒷정리를 마치고 다시 밤늦도록 따로 연습을 했다.
94년 시즌이 끝나갈 무렵인 가을들어 그런 대로 실력이 붙었다는 확신이 섰다. 코치들에게 테스트를 받게 해달라고 졸랐다. 평소 성실한 연습을 지켜본 코치들은 쾌히 승낙했다. 희망의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테스트를 통과, 2군 선수가 되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날아갈 듯 기뻤다. 좌절이 컸었기에 기쁨도 컸다. 연봉은 1,200만원.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다시 스타의 꿈을 키울 수 있게 된 것만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2군선수가 됐어도 고달픔은 여전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간단한 운동을 마치고 개포동 집을 나서면 8시반. 잠실에서 구단버스를 타고 구리시 연습장으로 가 옷을 갈아 입고 포수전문 코치에게 짤막한 지도를 받고는 10시부터 곧바로 단체운동에 들어 간다. 상오에는 주로 수비연습을 하고 낮 1시에 시작되는 하오 연습때는 투수의 공받기와 타격 연습을 한다. 하오 5시부터는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개인연습에 매달린다.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하오 8시30분. 몸은 벌써 파김치지만 쉴 수가 없다. 집 근처 놀이터에서 또 연습을 한다. 불펜포수 시절의 악몽을 떠올리면서 이를 악물고 피로와 싸운다.
원정 경기를 갈 때도 룸메이트가 잠들면 몰래 나와 밤연습을 했다. 연습벌레 소리를 듣는 선배들만이 1군으로 옮겨가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에 방심은 절대금물이다. 동계 훈련 때는 하루에도 여러번 체력의 한계에 부딪쳐 그대로 죽을 것 같기도 했다. 연습을 거듭하면서 곧 1군으로 올라갈 것 같은 자신감에 뿌듯해 지기도 한다. 그러나 겨울은 2군선수에게는 역시 음산한 계절이다. 함께 운동을 하던 동료들의 모습이 어느날 갑자기 눈에 띄지 않는다. 탈락한 것이다. 그래서 겨울에는 늘 구단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몸을 다쳐도 쉽사리 말을 할 수가 없다. 언제 목이 달아날 지 모른다.
쓸모가 없는 선수는 냉혹하게 버림받는 것이 2군 세계의 생리다. 쌍방울 2군선수 때와 불펜포수 시절의 씁쓸한 기억도 지금은 약이다. 어려운 현실을 견딜 수 있도록 버팀목이 돼 준다. 때로 감독이나 코치가 『가능성이 있다』고 넌지시 한마디 해주면 힘이 솟는다.
그러나 그런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는다. 오로지 눈앞에 나타나는 실력만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 무기이다. 하루 몇번씩이고 「다시는 실패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과연 1군으로 올라갈 수 있을지 앞날은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그저 앞을 향해 달릴 수 밖에….
◎후보가 있어야 스타가 있다/‘노력·실력 더하기 운’/신화를 좇는 이들이 있기에 성공신화가 탄생
스타들의 가장자리를 맴도는 「후보 인생」. 극히 일부만 꿈을 이루고 나머지는 이내 유성처럼 스러진다. 그러나 퇴비같은 이들의 존재가 스타탄생의 비옥한 토양을 이룬다. 이들이 없으면 스타도 없다.
스타는 신화를 만들고 후보는 신화를 좇는다. 신화의 주인공이 늘 그렇듯 스타는 밝게 빛나기 전 역경과 시련을 겪는다. 숱한 고비를 넘고 고난의 강을 건너서야 비로소 「후보 인생」의 허물을 벗는다.
「후보 인생」에게는 각고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빛을 발하기까지는 운도 작용한다. 엇비슷한 「후보 인생」 가운데 누가 꼽히느냐는 단순히 실력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운이 있어야 이끌어 줄 사람과 기회를 만날 수 있다.
「후보 인생」은 청춘을 과감하게 던지고 한 판의 도박을 벌인다. 성공하면 돈과 명예를 일거에 얻지만 곳곳에 널린 걸림돌을 넘지 못하면 청춘을 날리고 무대 뒤편으로 쓸쓸하게 퇴장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꿈을 좇아 헤매는 부나비들인 것만은 아니다. 애초에 꿈을 포기하고 이리저리 휩쓸리며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세상이다. 꿈을 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 그들은 어쩌면 세상의 소금일 수도 있다.
어느날 아침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을 때를 갈망하는 그들이 모두 스타가 될 수는 없다. 탈락자들을 영원한 후보로 방치하지 않고 일상적인 생활인의 자리로 되돌아 올 수 있도록 다양한 출구를 마련하는 것은 사회의 몫이다.<조재우 기자>조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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