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한·김동훈씨 문화계 슬픔/국악계선 김월하·강도근씨 떠나/가수 김광석·서지원 자살도 충격/조순탁·김치선 박사 ‘상아탑 아픔’/정계에선 조윤형·구자춘씨 타계많은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다행히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과 같은 대형참사는 줄었지만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이나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최덕근 영사 피살사건 등 아물지 않은 남북분단의 후유증은 나라 안팎에서 무고한 희생자들을 만들어 냈다. 특히 올해에는 어느 해보다 더 많은 문화계의 거목들이 유명을 달리해 국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생존하는 민족문학의 큰 나무였던 요산(낙산) 김정한 선생이 올 한해를 다 보내지 못하고 11월28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등단작품인 「사하촌」을 비롯해 「축생도」 「산거족」 「어둠 속으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농촌문학에 쏟은 선생의 애정을 기려 후학들이 기념관과 추모비 건립작업을 하고 있으며 생전에 한사코 거부했던 전집발간도 조만간 이뤄질 예정이다.
3월21일 배우 김동훈의 타계는 연극계의 슬픔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역을 가장 잘 연기한 배우로 평가받은 김씨는 실험극장 창립동인으로 소극장운동과 지방연극 발전에 앞장섰으나 57세에 아깝게 유명을 달리했다.
세계만방에 국악의 멋과 흥을 알린 인간문화재 김월하 여사가 새해 첫 날 타계했으며 민족의상의 권위자였던 단국대 민속박물관장 석주선 여사(3월3일), 동편제 판소리의 마지막 대가로 평생 고향을 지키며 향토의 예맥을 이어온 고집스러운 예술인 강도근 명창(5월13일)이 잇따라 우리 곁을 떠났다.
대중의 사랑을 받은 가수들의 비정상적인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10대들 사이에 떠오르는 별이었던 가수 서지원(본명 박병철)이 2집앨범 출반을 앞두고 새해 첫 날 열아홉의 나이에 음독자살한 데 이어 닷새 뒤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 출신으로 청·장년층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김광석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충격을 주었다.
학계에서는 민중신학의 주춧돌을 닦은 신학자이자 재야운동가 안병무 박사(10월19일)가 심장질환으로 타계했으며, 한국불교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이기영 박사(11월9일)는 동국대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쓰러진뒤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노벨상후보로 거명됐던 한국 물리학계의 태두 조순탁 박사(4월30일)와 국내 노동법학의 원로인 김치선 박사(11월25일)의 부음은 상아탑의 아픔으로 남았다.
정계에서는 2월2일 조윤형 2월10일 구자춘씨 등이 구태의연한 한국 의회정치를 뒤로 한 채 눈을 감았다. 강직한 군인의 표상이었던 한신 장군도 5월6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후배들의 오열 속에 눈을 감았다.
9월18일 강릉에 침투한 북한잠수함사건은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소탕작전 과정에서 공비 14명이 사살되고 11명이 자살했다. 우리측에서도 민간인을 포함해 16명이 사망했다. 단일 사건으로 올해 최대의 피해자를 낸 이 사건은 죽음보다 강했던 「붉은 사상」에 온 국민의 치를 떨게 했다. 10월1일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최덕근 영사가 괴한들에게 독침으로 살해됐으나 아직까지 북한의 개입여부는 시원스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같은 달 23일에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씨가 은거하던 인천자택에서 박기서씨에 의해 살해돼 백범 암살 후 47년4개월여 동안 파란만장했던 도피생활을 마감했다. 많은 것을 남기고 간 썰렁한 죽음이었다.<송용회 기자>송용회>
◎죽음과 법/사형제도 존속 논란/헌재 ‘합헌’ 결정으로 마감/뇌사 법적인정문제 8년만에 입법화도
96년은 「죽음」에 얽힌 각종 법적 논란이 유난히 많았던 한 해였다.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항소심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인 11월28일 헌법재판소는 사형이라는 「제도살인」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선언, 그간의 법적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헌재는 사형제도에 대한 헌법소원을 두 차례나 각하하는 등 수년동안 「의도적」으로 판단을 미뤘지만 이날의 평의결과 9명의 재판관 중 무려 7명의 재판관이 합헌의견에 표를 던졌다. 『다른 생명과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사형 존속이 불가피하다』는 다수의견이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오판의 경우 원상회복이 불가능한 사형제도는 폐지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누른 것.
세계적으로 100여개 국가에서 이미 사형제도가 폐지됐지만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 등 94개국과 함께 사형제도 존속국으로 남게 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94년 14명, 95년에는 19명의 사형수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합헌판결이 난 올해는 단 1건의 사형집행도 없었다. 국무회의는 최근 「사형선고는 신중해야 한다」는 선언규정을 담은 형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뇌사의 법적인정문제도 올해 입법화단계 문턱까지 왔다. 보건복지부는 5월 「장기이식법률 제정추진협의회」를 정식으로 발족시키고 한달 후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시안」을 발표, 뇌사와 장기이식을 합법화하기로 했다. 88년 3월 대한의사협회가 「뇌사 공청회」를 개최해 최초로 문제를 제기한 지 8년만에 입법화의 결실을 본 것이다.
그러나 종교계와 법조계 등 사회일각에서는 『죽은 자는 인권이 없는가』 『1%의 소생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 있는가』라며 반발해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88년 여론조사 결과 국민 중 47%만이 뇌사의 법적인정에 찬성했지만 10월 복지부의 여론조사결과 국민의 70.8%가 뇌사의 법제화와 장기이식에 동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9월엔 검찰 간부가 「뇌사만 아니라 안락사문제도 입법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이태희 기자>이태희>
◎달라진 영안실/재벌병원 등장이후 ‘서비스 경쟁’/술·도박·밤샘없는 장례식장도 나와
정당 부총재, 중견기업 대표이사, 금융사 회장, 대기업 이사, 교육청 교육장…. 23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의료원 영안실에 빈소를 차린 사람들이다.
「죽은 자의 메카」라는 별칭에 걸맞게 삼성의료원 영안실에는 일간지 부음란을 장식하는 유명인사 3분의 1 이상이 몰리고 있다. 치료는 서울대병원 등에서 받고 빈소만 삼성의료원 영안실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이같은 경우가 한달에 200건이 넘는다. 현대그룹에서 운영하는 서울중앙병원도 비슷하다.
재벌병원 등장 이후 서비스경쟁으로 영안실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인기를 끄는 이유는 간단하다. 서울대병원 영동세브란스병원 등 기존 대학병원이 좁은 공간과 노후한 시설로 장례를 치르기에 어려움이 많은 반면, 넓은 공간과 깨끗한 시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삼성의료원 영안실은 많은 투자를 하고 국내 최초로 대졸 공채사원을 배치하는 등 새로운 경영기법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호텔수준의 시설과 직영에 따른 저렴한 비용, 넓은 무료주차장 등이 강점으로 꼽힌다.
기존의 영안실을 새롭게 「정비」한 곳도 있다. 5월1일 개원한 신촌의 연세의료원 장례식장은 국내 최초로 술과 도박, 밤샘이 없는 영안실이다. 연세장례식장의 가장 큰 특징은 그동안 관행이 돼왔던 빈소에서의 술대접과 화투 등 도박을 금지한 것. 개원 초만 해도 전통적인 장례문화에 익숙한 상주와 문상객들이 술과 떡 등을 몰래 들여오다 병원측과 마찰을 빚는 경우가 있었으나 요즘은 문상객들이 주변 식당과 카페 등을 스스로 찾아간다는 것이다.
재벌병원 영안실의 등장과 연세의료원 장례식장의 변신은 다른 병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내 최대규모를 자랑했던 서울대병원 영안실은 낡고 불편한 시설 때문에 지명도 있는 인사들의 이용이 줄어들자 내년에 최신 설비를 갖춘 영안실을 증축할 계획이다. 전국병원홍보협의회 박두혁 회장은 『환자 편의위주의 신경영개념이 병원에 확산되면서 영안실도 고급화·차별화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고재학 기자>고재학>
◎사라진 큰 별/대중가요 작곡가 박시춘씨/서민애환 그려낸 한국가요사 증인
올해가 꼭 절반 지난 6월30일 밤 대중문화의 큰 별 박시춘(본명 박순동)씨가 83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났다. 광복과 6·25 등 어려웠던 시절 박씨는 서민들의 애환을 노래로 달래준 대중문화의 산 증인이었다.
고향인 밀양을 떠나 작곡을 시작한 그는 18세 때인 1931년 데뷔곡 「애수의 소야곡」으로 일제하의 나라 잃은 애수를 달랬으며 「신라의 달밤」에 해방의 기쁨을 노래했다. 「굳세어라 금순아」와 「비내리는 부산항」에 6·25의 슬픔을 실어 냈고, 「전선야곡」 「가거라 삼팔선」으로 남북분단을 아파했다. 그가 오선지에 담아낸 3,000여곡의 노래는 그 자체가 우리의 현대사이자 한국 가요사의 풍상이었다. 60여년간 서민과 함께 살아온 그는 노환에 시달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만년소년」이었다. 그의 노래를 통해 남인수 현인 백설희 등 숱한 스타들이 배출됐다. 랩, 힙합 등 국적불명의 음악이 전염병처럼 노래판을 휩쓸고 있지만 그에 대한 추모의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박씨의 막내아들 재정(38)씨는 미국에서 신학대학원에 진학했으나 최근 음악으로 방향을 바꿨다. 재정씨는 『아버지의 곡을 직접 연주하고 싶다』며 『아버지의 노래를 한 권의 책으로 내고 노래를 불렀던 가수들을 한 자리에 모아 공연도 가질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씨의 조그마한 묘석은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일정리 몇 평 되지 않는 땅을 지키고 있지만 그의 깊은 영혼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묻혀 있을 것이다.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요마는/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니…」(「애수의 소야곡」 중에서)<박일근 기자>박일근>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