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관딛고 일어선 힘찬 연기돈 많은 노인의 첩이 된 여인이 답답한 끝에 점쟁이를 찾는다. 과거에 지은 죄가 많다길래, 부모 몰래 상경하여 청계천 평화시장 직공과 접대부를 거쳐 첩살이까지, 그간의 일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남은 게 있단다. 결국 정말로 감추고 싶었던 죄를 밝힌다. 애비 모를 자식을 낳아서 버렸던 것이다. 그래 썩은 시신이라도 건져 넋을 위로하고자 왕십리 살곶이 다리 옆 웅덩이를 찾는다. 그런데 어찌 된 건지 아이의 시신이 막대기를 저을 때마다 걸려나온다.
윤대성 작 「너도 먹고 물러나라」는 73년 이대 앞 카페 파리에서 초연됐다. 당시 소경 판수 역은 오현경이었다.
서슬 퍼렇던 유신 시절, 다방 한 구석 손바닥만한 무대에서 눈과 귀를 막은 대중 앞에 부조리를 상징하는 여남은 개의 시신을 벌여놓고 「아무개 귀신! 너도 먹고 물러나라!」하고 읊어대는 30대 후반의 오현경을 상상해보라.
이제 20여년을 훌쩍 넘어 환갑을 지낸 오현경이 다시 그 배역으로 무대에 섰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사람이 바뀌어도 세상은 변한 게 없는 듯하다. 이번 공연을 위해 기꺼이 작품을 손본 윤대성은 「외적 상황은 많이 달라졌지만 실은 하등 변한 것이 없기에 크게 손댈 것이 없었고, 이보다 더욱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런 작품을 공연해야 되는 게 아닌지」묻고 있다.
오현경은 건강 문제로 상당 기간 활동을 중단했었다. 물론 작년 「로미오와 줄리엣」에 잠깐 등장하긴 했다. 그러나 많지않은 대사조차 벅찼던 그때와 달리 이번엔 한 시간여의 공연을 이경희(모조리네 역)와 단둘이 이끌면서도 예의 희극적 순발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정확성, 특히 대사 구사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연기를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은 우리 모두의 행운이다. 연말이다. 이처럼 「반성」과 「재기의 다짐」같은 표현이 어울리는 시점에, 그간 눈감고 모른 척했던 모든 잘못을 인정하라는 연극 「너도 먹고 물러나라」와, 난관을 딛고 일어서는 연극인 오현경을 만나보는 것도 뜻깊은 일이리라.<오세곤 연극평론가 가야대 교수>오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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