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통행금지없는 하룻밤/댄스파티 등 유행 ‘광란의 밤’/오일쇼크땐 장식물 금지 수난/82년 통금 전면해제로 ‘전성시대 끝’ 차분하게그때를 기억하십니까? 천막교회 톱밥 난롯가에 둘러 앉아 감귤 몇 개, 사탕 몇 알만으로도 한없이 풍성했던 시절의 성탄절을. 1년에 딱 한 번 친구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 성극을 보고 연필 몇 자루, 공책 몇 권을 받아들고는 즐거워했던 시절을.
「야통(야간통행금지)」 풀린 명동거리를 밤새 쏘다니며 헛헛한 청춘을 달래던 성탄 이브의 밤도 기억할 겁니다. 혹은 단 하루의 외박을 음모하던 젊은 날의 풋사랑도.
기독교적 의미를 떠나 사회문화적으로 볼 때 성탄의 의미와 풍속도는 시대에 따라, 사회상황에 따라 변천해왔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의 사회사는 바로 우리들의 지난 역사이자 이야기이다.
크리스마스가 법정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49년 6월 「관공서 복무규정」이 제정되면서부터. 그러나 당시만 해도 크리스마스는 축제일이었다기보다는 그저 하루 쉬는 날에 불과했다. 대형 교회들이 마련한 기념예배, 성극공연 등이 성탄의 분위기를 전해줄 뿐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좀더 적극적인 사회적 의미를 띠게 된 것은 5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하면서부터이다. 바야흐로 크리스마스는 그저 휴일이 아니라 이날 하루만큼은 밤새껏 먹고 마시고 즐겨도 되는, 혹은 「반드시 즐겨야 하는」 범국민적인 카니발이 되었다.
서울 명동과 충무로, 종로 일대는 「해방구」가 되었다. 거리는 하룻밤의 해방감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넘쳐났다. 해마다 성탄 비상경계령이 발동되어 경찰은 연중 가장 바쁜 날을 보내야 했다. 경찰서 유치장에는 취객, 싸움꾼, 바가지 요금 업주, 「집단불순유희행위범」(남녀혼숙) 등이 가득찼다.
거리로 뛰쳐 나온 사람들은 호텔과 여관, 카바레, 비어홀 등에서, 젊은 층은 음악감상실이나 다방 등에서 친구들과 하룻밤을 보냈다. 이날 만큼은 엄격한 부모들도 「외박」을 눈감아 주었다. 아베크족을 겨냥한 서울 심야관광이 새로운 상품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71년에는 크리스마스에 「고독녀·진실남」을 연결시켜준다는 소위 「데이트 카운셀링 오피스」라는 신종 첨단사업도 등장했다.
당시 크리스마스의 열기는 「크레이지마스」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뜨거웠다. 57년 12월25일자 한국일보 사회면은 「거룩한 밤…환락에 얼룩진 밤」이라는 제목으로 성탄전야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베이비」로 상징되는 방종과 일탈이 큰 사회문제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지도 모른다. 70년 모주간잡지에 실린 「성탄일 바람둥이는 신부 낙제생」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성탄분위기에 휩싸이면 아주 허망한 결과만을 초래하니 여자들은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 크리스마스를 맞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쓰고 있다.
크리스마스 축제 열기는 50년대 중후반에서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절정을 이루었다가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고비를 맞았다.
「크리스마스 바로 지내기」, 「연말연시는 가족과 함께」 캠페인이 해마다 등장했다. 내무부장관과 서울시장, 경찰서장, 각종 사회단체 회원들이 명동 일대에서 어깨띠를 두르고 확성기에 『청소년 여러분 일찍 귀가해 가족과 함께 성탄을 보냅시다』라고 외쳐댔다. 정부에서는 과소비 풍조 일소, 서정쇄신의 일환으로 강력한 단속, 처벌을 폈다.
75년에는 「오일쇼크」로 인해 크리스마스 장식물 설치를 일체 금지하는 등 크리스마스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크레이지마스」의 전통은 사회문화적 변화에 따라 댄스홀이 고고장과 디스코테크으로, 비어홀이 호프집으로 모습을 바꾸어 가며 80년대 초중반까지 꿋꿋이 이어졌다.
사회적 현상만으로 볼 때 크리스마스의 「최대 위기」는 단속이나 처벌이 아니라 82년 야간통금 전면해제였다. 365일 「밤드리 노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크리스마스 이브에만 유난을 떨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바야흐로 야간 통금해제와 함께 크리스마스 전성시대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가난했던 시절, 우리 생활의 남루함을 잠시 잊게해주고 더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게 했던 축복과 은총의 성탄절. 그러나 풍요로움과 함께 이제 크리스마스는 옛 「영화」를 잃어가고 있다. 「크리스마스 베이비」나 「댄스 파티」, 「그룹 미팅」은 이제 중·장년들의 향수 어린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크리스마스 실을 붙인 한 장의 크리스마스 카드는 휴대폰과 삐삐로 대체돼가고 있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변화는 크리스마스가 떠들썩한 카니발에서 가족 휴일로 정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연인들은 레스토랑이나 스키장으로, 혹은 햇볕 따가운 남국으로 여행을 떠난다. 온 가족이 성장을 하고 예배를 보거나 집안에 모여 트리를 장식하고 선물을 주고 받으며 성탄영화나 비디오를 즐기는 평화가 가득한 날이다.<황동일 기자>황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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