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가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 전직대통령 비자금사건 항소심재판부가 노태우씨의 비자금을 변칙적으로 실명전환해 준 재벌총수들의 「업무방해죄」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데 따른 것이다. 재판부는 『금융기관은 거래자의 실명여부만 확인하면 되는 것이지 돈의 실제 주인이 누구인가를 확인할 의무가 없으며, 따라서 피고인들의 행위가 금융기관의 업무를 방해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고 무죄선고 이유를 밝혔다.이 판결의 타당성 여부는 검찰이 대법원에 상고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결국 대법원에서 가려지게 될 것이다. 상고심이 금융실명제의 법정신을 극명하게 살릴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문제의 항소심판결이 법리적으로 하등잘못이 없다 해도 음성적인 금융거래를 일소하여 지하경제를 몰아내겠다는 금융실명제의 정신과는 크게 배치된다고 볼 수 있다. 이번 항소심의 무죄판결이 대법원의 판결을 통해 그대로 최종판례로 살아 있게 된다면 현행 금융실명제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질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금융실명제는 그 자체가 얼굴없는 돈의 정체를 밝히는데 완벽한 것은 아니다. 금융기관 종사자에 대해서 금융거래가 실명거래라는 것만을 확인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실명거래라면 통상적으로 본인이 직접 거래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차명이나 도명도 실명인 것은 사실이므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또한 현실적으로 차·도명을 가려낼 수 있는 손쉬운 방법도 없다. 무리를 한다면 식별해낼 수도 있지만 금융업무에 과다한 부담을 주거나 금융거래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왜곡시킬 수 있는 방법을 채택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으로 돼있는 현행 금융실명제는 차명이나 도명에 대해 진짜 실명과 차별화하지 않고 별도의 처벌규정도 만들어 놓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제도적인 허점이 금융실명제의 내재적인 취약점이다.
사실 은행지점 등 일부 일선창구에서는 얼굴노출을 기피하는 거액의 음성전주에 대해서는 합의 차명을 알선해 주는 등 변칙 실명거래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적발되는 경우 은행감독원은 관계종사원에 대해 과태료를 부과하고 징계조처를 했다. 검찰의 경우는 차명거래를 한 예금주나 이를 알선한 금융기관 임직원에 대해서 형법상 업무방해혐의로 기소, 대부분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금융기관 종사자가 아닌 개인이 차명거래를 알선하거나 실행하다가 적발된 것은 이번이 첫 케이스인데 검찰이 금융기관 업무방해죄로 기소했다가 실패한 것이다. 결국 관련금융기관 종사자가 아니면 차명거래알선자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금융실명제의 기반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됐다.
사법부가 법정신을 살려 금융실명제 관계조문 해석에 유연성을 보이지 않는 한 금융실명제 그 자체를 보완해야 할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