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화한 죽음 넘어서기죽음도 이제는 심드렁하다. 시인들이 죽음을 노래한지 벌써 긴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많은 시인이 죽음의 의식에 동참하였고 또 평론가들의 관람기가 쌓여갔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었다. 어느새 세상에서는 전생이 유행하였고 사람들은 그 미지의 세계를 알고자 서푼의 돈을 앞다투어 쾌척한다.
이제 새로운 시인들은 죽음이 상투화해버린 세상 한 복판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이중적으로 불운하다. 그들은 생을 노래할 수도, 사의 찬미를 부를 수도 없다. 생은 그들의 것이 아니고 죽음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양수 속의 시인들은 이궁지를 뚫고 나가야 고유명사가 될 수 있다는 걸 절감하리라.
김소연의 「극에 달하다」와 강 정의 「처형극장」(이상 문학과지성사간)이 그 싸움을 정직하게 치뤄내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김소연은 「죽음에다 대고 한없이 찬성표를 던지고만 있어서는 안된다」고 선언하고, 강정은 「왜 내 시가 파멸을 상정하지 않는가」에 대한 불안을 독자에게 독촉한다.
두 시인의 방향은 물론 다르다. 김소연은 죽음들 사이에 생을 배치한다. 그 생은, 그런데 죽음들 사이에 리비도를 순환시키는 그런 생이 아니다. 그것은 후끈한 열기이자 동시에 「뻑뻑한 밀도」이며, 널름대는 불이자 동시에 방화벽이다. 그의 생은 죽음에 유혹되어 있지만, 그것과 근본적으로 어긋나고 낯선 것이다. 그것은 죽음마저도 상품화하는 세상에 대한 응시, 생경한 물음표를 꼭꼭 찔러박는 응시이다.
강정은 허영호나 고상돈이 산에서 갔던 길을 시에서 간다. 그는 죽음의 북극까지 간다. 그러나, 그는 정복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죽음이 되면서 간다. 그러니 그가 가는 한 죽음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매순간의 처형속에 어떤 파멸도 없다. 당연히 죽음에 대한 어떤 변명도 장식도 없다.
응시자의 길이든, 중독자의 길이든 그들의 싸움은 생의 환상과 죽음의 성화를 동시에 거부한다. 그 사이에서 시의 죽음은 죽음의 시로 다시 태어나 죽음 너머의 질긴 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 후생을 사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이랴.<정과리 문학평론가 충남대 교수>정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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