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 몸보신 위해 태반 먹기도”/식량배급 끊겨 풀뿌리죽 연명/전쟁준비 1백%·군 사기위해 중국담배 수입 배급/김일성 사망후 “집에서 웃음소리났다” 조사받기도/매일 열리는 장마당이 유일한 살길,소매치기 설쳐김경호(61)씨 일가는 1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남반부 출신, 월남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감시와 천대를 받으며 가슴 아픈 생활을 했다』며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 탈북했다』고 말했다.
―탈출 경위는.
(최현실) 『지난 7월 어머니로부터 중국에 가겠으니 나오라는 말을 인편을 통해 전해듣고 48년만에 어머니를 중국에서 만났다. 어머니가 「한국에 가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권유했다. 자녀와 사위들의 의향이 걱정스러웠는데 이들도 「부모님 의사를 따르겠다」고 해서 「두만강만 넘으면 내가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회령지역의 식량사정은.
(최현실) 『식량배급이 지난 1월 이후 중단됐다. 굶어죽는 사람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강냉이죽, 풀뿌리죽 등을 섞어 먹어 영양실조 상태이고 결핵, 간염 등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탈출과정에서 고비는.
(김명숙·3녀) 『두만강을 건널 때와 동남아국가(홍콩을 지칭) 수용소에 있을 때였다. 강을 건너면서 아버지의 병이 악화할까, 철없는 아이들이 소리를 내지 않을까 긴장했다. 또 동남아국가에서 지낼때 언론에 우리의 탈북소식이 나오는 것을 보고 안전이 걱정돼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했다』
(최현실) 『탈출과정에서 붙잡혀도 다시 북한에 끌려갈 수는 없다는 각오로 쥐약을 준비하자는 이야기도 했으나 실제로 준비하지는 않았다』
―올겨울 탈북할 사람이 많을 것 같은가.
(최영호·사회안전부 노무원) 『당국이 국경수비를 강화해 국경을 넘기가 쉽지 않다. 주민들이 선뜻 결심하기가 쉽지 않다』
―북한의 전쟁 준비 실태와 전쟁에 대한 주민의 인식은.
(김일범·넷째 사위) 『양식과 피복 등의 전쟁예비 물자는 1백% 준비돼 있다. 김정일은 군인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중국산 담배를 수입, 배급하고 사상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김명숙) 『전쟁을 겪은 세대는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파괴된다는 이유로 전쟁에 대해 부정적이다. 잘 사는 간부들도 TV를 통해 국내사정에 정통하기 때문에 전쟁을 해서 이로울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반 주민들은 앉아서 굶어 죽는 거나 전쟁이 나서 죽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북한의 어린이 교육은 어떤가.
(박현철·명숙씨 아들) 『북한에서 남한 학생들은 공부도 못하고 돈이 없어 학교에 다니지도 못하고 군인들은 강도짓을 하고 민간인도 막 죽인다고 들었다. 북조선 인민학교 선생님들이 거짓말을 했다』
―월남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차별 받았나.
(김성철·차남) 『학교 졸업할 때 월남자 가족이어서 인민군대와 대학에 가지 못했다. 그래서 시계수리공이 됐다』
―북한에 시장이 형성돼 있는가.
(박수철·셋째 사위) 『전국 각지에 장마당이 서 있다. 원래 10일 간격으로 장마당이 열렸으나 지난해 7월부터는 식량난으로 매일 장이 선다. 장마당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생로다. 장마당에는 공장 기자재와 이불, 구두 등의 세간살이가 나온다. 전문 홀치기꾼(소매치기)도 설쳐 옷장사를 하는 사람은 옷가지를 동여매 훔쳐가지 못하게 하고 신발장사하는 사람은 한짝만 내놓는다. 장마당에는 전직 공무원과 일부 간부 부인들도 나온다』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애도를 표시했는가.
(최현실) 『김일성 사망 때는 웃음소리가 집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회령시장에게까지 보고돼 조사를 받았다.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당국이 감시해 할 수 없이 꽃다발을 들고 가 애도를 표시했다』
―남한에서 가장 좋은 것은.
(박봄·명숙씨 딸) 『옷도 많고 사탕과 과자도 많아 좋다』
―분조도급제가 어떤 것인가.
(김금철·장남) 『곡물 수확량의 일정분은 국가에 바치고 나머지는 농민들이 나눠 가지는 제도로 올해초부터 시행됐다. 농민들은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겠구나 하고 기대가 컸는데 목표량이 너무 높게 책정된데다 비료를 비롯한 영농자재가 제대로 지원되지 않아 성과가 극히 부진하다』
―창성특각은 어떤 곳인가.
(박수철) 『압록강 호숫가에 있는 김일성 별장으로 74년부터 85년까지 그곳에 근무할 때 김일성은 통상 5월부터 7월 사이에 이곳에 와 40일 정도 머물렀다. 김정일도 가족들을 데리고 와 1주일 정도 머물다 갔다』
―북한을 탈출한 뒤 중국 베이징(북경)에서 관광을 하고 사진을 찍는 등 탈북자로 보기에는 너무 여유가 있어 보였는데.
(김금철) 『공안당국이 이상하게 볼까봐 조선족 관광객으로 가장했다』
―해외친지의 경제적 도움은.
(최현실) 『92년 8월께 부모님이 미국에 살고 계신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이후 한번에 5백달러씩 보내줘 생활에 큰 보탬이 됐다. 그러나 당국은 이 돈을 한꺼번에 찾지 못하게 했다. 보통 해외에서 친지로부터 돈이 송금되면 몇년 걸려야 찾을 수 있다. 보내준 달러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1백달러당 2백3원내지 2백5원 상당의 「바꿈돈」으로 바꿔야 한다. 김일성이 죽은 후에는 돈과 약을 전달받지 못했다』<김병찬·서사봉 기자>김병찬·서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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