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누드화의 효시 ‘해질녘’이후/금기·터부의 황무지서 예술혼이 꽃피기까지/근·현대작가 66명 85점 작품 한자리에우리나라에서 누드의 역사는 「시련」의 역사다. 한국 누드의 첫 장으로 기록된 김관호의 「해질녘」(1916년)은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문전」에서 특선에 올랐으나 당시 우리나라 신문에는 사진조차 게재되지 못했다. 벗은 모습 때문이다.
또 1925년 제4회 조선미술대전에서 4등상을 차지한 도쿄(동경)미술학교 재학생 이제창의 나부반신상 「연인」은 「이해없는 일반의 부도덕한 흥분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사진촬영조차 금지 당했다.
우리나라에서의 누드의 시련은 계속 이어져 김흥수 작 「나부군상」역시 나체화 철거소동을 빚었다. 1949년의 일이다.
누드가 소개된 지 80년. 예술의 전당이 기획한 「한국 누드 미술 80년전」은 우리 근대미술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누드미술의 역사를 정리하는 계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근현대 우리미술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24명의 작고작가와 42명의 생존작가 작품을 한데 아우르고 있어 「누드 통사」를 작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모두 66명의 작가, 85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다만 도쿄대에 소장된 김관호(1890∼1959)의 「해질녘」이 주최측의 준비 소홀로 사진으로 걸린다는 점이 전시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치명적 약점으로 지적됐다.
도쿄미술학교 유학생을 중심으로 우리 화단에 소개 되기 시작한 누드화는 이종우(1899∼1981)의 「누드 남자」(1926), 도상봉(1902∼1977)의 전신입상인 「누드」(1927) 등으로 초기 역사를 작성한다. 이 시기의 작품은 정적이고 수동적인 포즈가 많은 것이 특징. 평론가들은 이를 두고 「일본 식민지 미술」의 잔재라고 보고 있다.
「여체 찬미」를 벗어나 역사 속 고난과 시련의 주인공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은 해방 후 이쾌대(1913∼?)가 남긴 누드작품 「군상」 시리즈. 한국 누드화 중 최고의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김환기(1913∼1974)의 「항아리와 여인」이 구성미로 새로 태어난 누드를 선보이고 있는 반면, 박영선(1910∼1994)은 「화가와 모델」 「청춘」 등의 누드 연작에서 여체미에 집중하고 있다. 김흥수의 작품 「나부」 「콤포지션」 「고민」 등은 심상적 표현으로 농밀한 에로티시즘의 표현을 더욱 강화했다.
또 최영림, 박항섭, 김종하, 천경자, 이만익, 오승윤, 강연균, 이숙자, 이두식, 서정태, 조덕현 등 현대작가들의 작품은 누드화의 다양한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21일부터 내년 1월12일까지(매주 월요일 휴관). (02)580―1234.<박은주 기자> ◎누드의 역사 박은주>
벌거벗은 모양이나 사람을 일컫는 단어 「누드(nude)」는 「나체(naked)」와는 구별된다. 의도된 나체, 예술적 혹은 외래적 뉘앙스나 관념이 개입된 것을 누드라 칭한다.
아름다운 조형물로서의 인간의 육체에 대한 의식은 원시 동굴 벽화에서도 나타나듯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특히 그리스에서는 신체와 정신이 완전한 이상적 인물을 그려내기 위해 인체비례를 수학적으로 탐구했다. 그러나 육체를 욕망의 근원으로 보는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는 누드화를 금지시켰고,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야 다시 꽃을 피웠다.
현대에 와서는 「벗는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기 시작해 2차 세계대전 직후의 「누디즘(나체주의)」에서는 인간의 원시적 건강성의 회복을 위해, 미국의 히피운동에서는 사회의 터부를 깨는 대항의 행위로 누드를 차용하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페미니즘 미술학자들은 누드가 수동적이거나 복종적인 여성의 자세를 그려냄으로써 「정복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이미지를 재생산해왔다고 논박하고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