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쪽 가리키며 “어릴때 낯익은 곳”/“처음 먹어보는 불고기 소화 잘되겠나”『서울 참 대단하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김경호(61)씨 일가족 등 17명의 첫 서울 나들이는 감탄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김씨의 차남 성철(26)씨는 『북한에서 듣던 것과 너무나 달라 많이 놀랐다』며 『이제야 사선을 넘어왔다는 안도감이 든다』고 서울 첫 나들이의 소감을 말했다.
○시민환대에 밝은 표정
김씨 일행이 처음 도착한 곳은 남산 서울 타워. 이들은 소형버스에서 내릴 때는 다소 굳은 표정이었으나 근처에 있던 시민들이 『서울에 잘 왔다. 환영한다』며 인사를 건네자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고 대답하며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김씨는 휠체어를 탄 채 남산을 오르면서 『남산은 어릴 때 이태원동에 살면서 자주 올라와 놀던 곳』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전망대에 올라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용산구 이태원동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어눌한 목소리로 『너무 많이 변했지만 2학년까지 다녔던 이태원 국민학교와 주변의 길들은 낯이 익다』고 말했다.
○판잣집만 있다더니
또 김씨의 차녀 명실(36)씨는 전망대 앞에 펼쳐진 거대한 빌딩 숲과 자동차의 행렬을 바라보면서 『북한에 있을 때 서울에는 판잣집만 있다고 들었고 텔레비전에서도 판자촌에 사는 인민들의 모습만 보았다』고 말한 뒤 『정말 그런 줄 알았는데…』라며 수줍게 웃었다.
성철씨는 『회령에는 차도 없을 뿐 아니라 있어도 기름이 없어 굴러다니지 못한다』면서 택시를 가리키며 『저 파란 차는 뭐하는 거냐』고 묻는 등 차량행렬에 많은 시선을 빼앗기는 모습이었다. 평양에 한번 간 적이 있었다는 성철씨는 『평양에 고층빌딩은 있지만 사람이 적어 쓸쓸한 기분만 든다』면서 『거기에 비하면 서울은 사람도 고층 건물도 참 많다』고 말했다.
임신 8개월째인 김씨의 넷째딸 명순(28)씨는 나들이 내내 웃는 얼굴을 보여 김포공항 도착 당시 해쓱한 모습에서 크게 나아진 듯한 모습이었다.
명순씨는 서울타워에 도착,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속이 메스껍다』며 멀미를 호소하기도 했다. 서울타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는 『맛이 아주 좋다』며 『북한에서는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라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박봄(5)양 등 김씨의 손자와 손녀 5명은 기념품점에서 파는 장난감을 사달라며 졸라대 주위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고 서울타워내 전자오락실에 들어가자 곧 놀이기구를 타는데 열중하기도 했다.
김충진(6)군은 동행한 직원이 컴퓨터 즉석촬영 코너에서 기념사진을 찍어 이 사진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혀주자 카메라 앞에서 손을 흔들어 대며 여유있는 포즈를 취했다.
김씨 일행은 이어 중구 남산동에 있는 한정식집 「연정가든」에서 점심으로 한우등심을 먹으면서 『북한에서는 풀죽이나 강냉이 죽으로 연명했으며 불고기를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 소화가 잘 될지 모르겠다』며 『남한은 보통 사람들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겨울철 야채에 놀라
김씨 일가는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북한을 탈출한 탓인지 다양하고 풍성한 음식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김씨의 셋째 사위 박수철(38)씨는 『겨울철에 남새(야채)를 먹는다는 것은 북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놀라워했다.
박씨는 또 한정식집을 보고 『북한에서 당 간부들이 주로 가는 평양 「옥류정」이 이만한 규모일 것』이라며 『북에서 온 우리를 환대하려고 호사스런 식당에 데려온 것이 아니냐』고 질문했다.
이들은 롯데백화점 본점과 남대문 시장에 들러 산더미처럼 쌓인 상품들을 보고 매우 놀라는 표정이었는데 명실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점포에 쌓인 물건들을 만져보면서 『이것들이 모두 한국에서 만든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외손녀 박봄양은 롯데백화점 본점 6층 완구코너에서 가지고 놀던 장난감 자동차를 놓지 않으려고 부모에게 떼를 쓰기도 했고 유모차를 탄 아이를 보자 달려가 뺨에 뽀뽀를 하는 등 애교를 부려 시민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전도사에 잡혀 웃음도
김씨 일행이 서울 남대문시장에 나타나자 토요일 하오를 맞아 쇼핑을 나왔던 시민들과 시장 상인들은 김씨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서울에 잘 왔다』고 한마디씩 건넸다. 이곳에는 이북 출신 상인들이 많은 때문인지 김씨 일행을 맞이하는 환영분위기가 서울타워나 롯데백화점과는 많이 달랐다. 김씨 일행도 이에 고무된 듯 간간이 손을 흔들며 『감사합니다』고 답례했다.
김씨 일행이 시장을 둘러 보던중 한 전도사에게 붙잡혀 노상 전도를 받는 해프닝이 벌어져 주변 사람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확성기로 『하나님을 믿어라. 회개하라』고 외치던 한 60대 전도사는 휠체어를 탄 김씨를 알아보고 덥석 껴안고 『잘 왔습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천국이 있습니다』라며 한동안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말을 제대로 못하는 김씨는 그냥 웃기만 했다. 한편 김씨 가족들은 세종대왕과 퇴계 이황 등 역사적 인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어 북한정권의 역사교육이 심각하게 왜곡됐음을 반영했다. 성철씨는 동행한 기자들이 1만원권 지폐에 새겨진 세종대왕의 그림을 보여주며 『이 분이 한글을 만드신 분인데 아느냐』고 묻자 『북한에서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며 오히려 의아해 했다.
이날 동행한 관계자에 따르면 김씨 일가는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는 법,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법, 번 돈을 저축하는 방법 등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상당기간의 적응교육이 필요하다. 이 관계자는 『김씨 가족이 지금 당장 사회에 나간다면 밥해 먹는 일도 할 수가 없는 백지 상태』라고 설명했다.<송용회·이동국 기자>송용회·이동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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