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월세방 나서 일터로/비가 오지않는 한 휴일은 사치/하루 1만∼2만원 벌이/아픈 몸이 그 이상은 허락안해/한때 어선 선장도 했지만 이젠 자식도 고향도 미련이 없다/작은 바람이 있다면 손난로뿐서울 종로 조계사앞 「붙박이 거지」 고모(50)씨의 하루는 아침 6시에 시작된다. 젊은 시절 고깃배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던 습관이 아직까지 몸에 배어 있다. 느긋하게 아침을 지어 먹고 「일터」로 출발한다. 웬만큼 비가 오지 않는 한 쉬는 날이란 없다. 「휴일」은 그에게 사치다. 벌이에 필요한 도구라고는 돈받을 비닐봉지와 헌 신문지 한장이면 끝이다. 그래도 옷만큼은 두툼하게 입고 나가야 한다. 거지에게 추위보다 더 큰 적은 없다.
버스를 타고 내릴 때마다 잘려 나간 왼쪽 다리가 원망스럽지만 걸어 다니는데는 의족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다. 상오 8시면 「일터」에 도착해 준비를 한다. 의족을 벗고 신문지를 깐 뒤 동전 몇 개를 비닐봉지 속에 미리 넣어 놓는다.
조계사를 드나드는 여신도들이 100원짜리 동전 몇 개를 놓고 간다. 그때마다 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낯익은 주변 직장인이나 신도들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이따금씩 1,000원짜리 지폐를 내놓는 「착한 사람」도 있지만 10원짜리를 던지는 「몰상식한」 사람도 있다. 1만원짜리를 선뜻 내 주는 「대형 고객」을 만나면 그날 장사는 그만이다. 하루 수입은 보통 1만∼2만원. 신도들이 몰리는 매달 초하루나 보름에는 갑절을 벌 수 있다.
하오 1시면 일찌감치 「퇴근」해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는다. 하오 늦게까지 하면 더 벌 수야 있겠지만 몸이 허락하지 않는다. 상오 한나절 4∼5시간 앉아 있는 것도 그에겐 고통이다. 절단된 다리가 욱신욱신 쑤시고 추위 때문에 온몸이 얼어 붙는다. 외롭고 무료할 때면 술을 마시기도 한다. 술이래야 소주 한병과 과자 한봉지, 김치 몇조각이 전부다. 그나마 안주는 잘 먹지 않는다.
고향인 경남 통영에서 그는 어선 선장이었다. 조그만 굴양식장도 있었다. 어느날 물일을 하다 다리에 생긴 상처가 낫지 않고 자꾸만 도졌다. 벌써 15년전의 일이다. 병원을 전전했지만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돌고 돌다가 서울 국립의료원에서 「버거스병」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동맥경화로 모세혈관에 피가 통하지 않아 조금만 상처가 나도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불치병이었다.
용하다는 약을 지어 먹으며 3년간 병원생활을 했다. 양식장과 어선은 병원비로 날아가 버렸다. 종아리에서 시작된 피부괴사가 악화해 결국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불구자가 된 그와 70노모, 2남 1녀를 남겨 두고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고 1년후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려 버렸다.
아내에게서 버림받은 배신감과 장애인이라는 자괴감을 술로 달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면서 고향 친척들까지 그를 외면했다. 더이상 고향에 있기 싫었다. 결국 87년말 서울로 왔다. 용산역 부근에 작은 월세방을 얻었지만 생계가 막막했다. 장애인을 일꾼으로 받아 주는 곳은 없었다. 동냥만이 살길이었다. 죽고 싶도록 비참했지만 그래도 살아야 했다.
벌이는 의외로 괜찮았다. 월세 8만원을 내고도 쌀값과 연료비 등 기본적인 생활은 꾸려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다리의 고통은 계속 따라 다녔다. 밤마다 다리가 마비되고 참을 수 없이 아팠다. 머리를 바닥에 박고 고통과 싸우다 보면 어느새 어슴새벽이었다.
거리와 지하철역 등을 전전하다가 7년전 조계사 앞에 터를 잡았다. 『고향보다 서울이 낫습니다. 대도시 사람들은 걸인에게 관대해요』 고향에 대한 미련은 버린지 오래지만 아이들과 노모를 보기 위해 가끔 통영에 간다. 회사에 다니는 첫째가 노모와 중고생인 동생들을 돌보고 있다.
비록 빌어 먹고 사는 처지지만 거지들한테도 불문율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지하철역 터미널 역광장 절 거리 위락시설 등 저마다 전문구역이 있어요. 강제로 남의 자리를 빼앗는 파렴치한 거지도 있지만 대개는 구역을 인정하고 평화롭게 지냅니다』
어차피 거지에게 내일은 없다. 그러나 거지도 두가지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수중에 몇천원만 생기면 즉시 술을 마셔 버리고 잠잘 곳도 없이 거리를 헤매는 무숙자들이고 또 한부류는 하루 벌이를 모아 월세방이라도 마련하는 출퇴근 거지입니다』 『동냥하는 방법도 다양해요. 자리를 잡고 앉아 깡통을 놓고 선처를 바라는 정통 붙박이가 있고 승객이나 행인들에게 한푼만 달라고 사정하는 접근형 거지가 있죠』 끈덕지게 행인을 물고 늘어지거나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악덕 거지, 상가를 돌며 구걸하는 상가 거지, 교회나 성당 등에서 소액씩 얻어가는 순회형 거지 등이 있다고 얘기에 신바람이 붙었다.
겨울은 거지에게 고난의 계절이다. 이 겨울 그의 작은 바람은 손난로를 장만하는 것이다. 추위로 다리가 저리고 아파 일하기가 갈수록 힘든 때문이다. 『저같은 거지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자식한테도 이미 미련이 없어요. 사람에 대한 기대는 버린지 오래입니다. 그저 굶지 않고 추위를 피할 수 있으면 족합니다』<배성규 기자>배성규>
◎부랑인의 보금자리 지하철역/밤 12시가 되면 하나둘씩 모여/소주 한잔에 잠자리는 골판지/아침이 되면 어디론가 떠난다
지난 3일 밤 벽시계가 12시를 가리키면서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3가역 지하 보도에는 덥수룩한 수염에 때가 시커멓게 들러 붙은 얼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곳은 정처없는 부랑인들의 보금자리다.
지하도 입구를 통해 찬바람이 밀려 들어오지만 부랑인들은 그리 불평할 일이 아니라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골판지와 비닐로 만든 잠자리에 몸을 밀어 넣었다. 군데 군데 소주냄새가 뒤섞인 악취가 풍겼다. 술기운마저 없으면 추위를 견디기가 한결 어려운 모양이다.
지하철운행이 끊기자 역무원들은 지하도내 전등을 끄는 등 퇴근 준비에 부산했지만 누구도 이들의 보금자리를 해치지는 않았다. 『어쩌겠어요. 여기서 내쫓으면 당장 얼어죽을 텐데. 가끔은 술주정이나 패싸움을 하고 오물로 지하도를 더럽히기도 하지만 불쌍한 사람들 아닙니까』 한 역무원은 『매일 오던 사람이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아 함께 다니던 부랑인에게 안부를 물으면 대개가 「죽었다」고 한다』면서 『새벽에 깨어나지 않아 병원에 실려간 사람도 여럿 있었다』고 말했다.
취재팀은 초점 잃은 눈으로 맨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는 한 노인에게 말을 붙였다. 깊이 패인 주름살과 백발,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의 불편한 거동 등 영락없는 70노인이었다. 그런데 이름을 「한 영희」라고 밝힌 이 노인의 나이는 놀랍게도 52세였다.
그는 순순히 인생역정과 일상을 취재팀에게 털어 놓았다. 『자존심을 버린지는 이미 오래』라는 그에게는 삶에 대한 절망과 체념이 묻어 났다. 한씨는 함석공으로 을지로 부근에서 작은 공장까지 경영했으나 8년전 결혼한 외아들과의 불화로 91년 여름 무작정 집을 뛰쳐 나왔다. 매사에 자신을 귀찮게 여기며 모욕을 주는 아들 부부와 사는 것이 지옥같았다. 부인과는 10년전 사별했고 공장 경영권은 아들에게 완전히 넘겨준 뒤였다.
그는 하루종일을 대개 지하철에서 보낸다. 지하철 첫차가 들어 오는 새벽 5시30분이면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바깥 바람을 쐰 뒤 바로 지하철을 탄다. 식사는 신설동 천주교회가 운영하는 급식소 「소망의 집」에서 한끼당 200원을 주고 사 먹는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없고 힘들어도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원칙」이다. 한씨의 몸은 5년간의 부랑생활로 만신창이가 됐다. 겨울에는 어김없이 동상으로 손과 발이 부어 올라 피범벅이 되고 2년전부터는 다리에 마비증세가 와 앉았다 일어서는 데만 1분이 넘게 걸린다. 수전증도 생겼다.
『손자가 보고 싶을 때도 있지만 이제는 정말 집에 돌아갈 수 없어요. 내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러다 죽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한 초로의 남자가 한씨곁을 지나가며 『오늘은 일찍 자리를 잡으셨네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넥타이는 매지 않았지만 양복과 바바리코트를 말쑥하게 차려 입어 얼핏 부랑인으로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역시 거리의 사람이었다. 『나온지 얼마 안된 사람입니다. 바퀴달린 여행용 가방에 옷가지와 개인 물품을 잔뜩 넣고 다니는데 잘은 모르지만 회사간부였던 것 같아요. 왜 나왔는지는 모르겠어요. 서로 그런 얘기는 하지 않으니까요』
4일 새벽 1시 또다른 부랑인 집합장인 서울역 지하보도는 을지로 3가역에 비해 분위기가 험악했다. 20여명의 40, 50대 중년 남자들이 술이 거나하게 취해 소리를 지르며 어슬렁거리거나 바닥에 주저 앉아 소주를 병째 들이키고 있었다. 60대의 한 노파는 동상과 무좀으로 허옇게 변색돼 피가 흐르는 발에 붙지도 않는 밴드를 연신 문질러 대고 있었다. 이 노파는 『발 괜찮느냐』고 관심을 표하자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꺼지라』며 손을 내저었다. 강한 적대감과 짜증이 섞여 있었다.<유성식 기자>유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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