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층 권위 실추 ‘근대화’ 기폭「동방」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1348년초 교황청이 있던 프랑스의 아비뇽에 나타났다. 4월에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환자가 발생했고, 8월에는 영국에 상륙했다. 1349년부터 스웨덴과 폴란드를 습격했고, 1351년에는 러시아에 이르렀다. 흑사병은 1353년에야 겨우 첫 고비를 넘겼다. 당시 교통수단 등을 생각하면 무척 빠른 속도로 온 유럽을 휩쓸었던 것이다. 이후 14세기말까지 흑사병의 대유행이 적어도 두 번은 되풀이됐다. 세번째 대유행이 끝난 것은 1388년 무렵이었다.
약 5년에 걸친 1차 대유행때 유럽인구의 3분의 1 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엄청난 재앙의 피해규모에 걸맞게 유럽사회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우선 대규모 노동력 상실로 수확이 감소하면서 기근이 잇따랐다. 영주와 농노 사이의 관계도 변했다. 실제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노의 수가 급격히 줄어 소작조건이 나아질 수 밖에 없었다. 어떤 경제사학자들은 흑사병이 근대적인 자작농이 탄생하는 조건을 마련했다고도 한다.
또 당시의 지배계급, 특히 성직자들의 권위가 많이 떨어졌다. 그들 역시 흑사병 앞에서 무력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병마에 쓰러져 가는 주의 어린 양들을 구제하기는 커녕 겁에 질려 달아나는 성직자들의 모습은 민중의 분노를 자아냈다. 이미 무너져 내리던 중세적 질서는 흑사병이라는 치명타를 맞고 더욱 비틀거렸다. 이 점에서 흑사병은 「근대유럽을 연 질병」이라는 영광스런(?) 별칭을 갖게 됐다.<황상익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황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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