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4만명이 거리를 떠돌고 있다/부랑인의 현황과 실태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4만명이 거리를 떠돌고 있다/부랑인의 현황과 실태

입력
1996.12.12 00:00
0 0

◎유랑… 구걸… 술… 새우잠/정신병·장애·사회부적응/기구한 사연 지닌 잊혀진 이들/매년 1,000명씩 길에서 죽는다행인들이 종종걸음으로 귀가길을 재촉하는 지하철역 통행로. 바닥에 신문을 깔고 멍하니 앉은 사람, 비닐을 뒤집어 쓴채 아무렇게나 쓰러져 자는 사람, 연신 병째 소주를 들이키는 사람, 뜻 모를 고함을 지르는 사람…. 화려한 서울의 밤, 그 이면에 가려진 버림받은 사람들의 세계가 열리는 시간이다.

서울역 부근에서 노숙하거나 떠도는 부랑인들은 200여명. 을지로 시청 종로 등에도 각각 20명 가량의 부랑인들이 비닐과 골판지 박스를 요·이불삼아 통로를 메우고 있다. 서울 어느 지하철역에나 노숙하는 부랑인이 있다.

『전국적으로 4만명 이상이 거리를 떠돌고 있습니다. 부랑인 복지시설에 수용된 1만 3,000명의 3배가 넘지요』 한국부랑인 복지시설연합회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들 부랑인 가운데 일부는 생계를 위해 구걸을 한다. 서울의 경우 한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구걸하는 「붙박이 거지」는 1,000여명. 승객이나 행인에게 돈을 구걸하거나 상가를 도는 「떠돌이 거지」도 3,000여명에 달한다.

대부분의 부랑인들은 교회 성당 사찰 등 종교단체를 전전하며 몇백원의 동냥을 얻어 생활한다. 적은 돈이지만 부랑인들에게는 젖줄과도 같다. 이돈으로 신설동 「소망의 집」이나 용산 「베들레햄」 등 구호단체의 부랑인 전용식당의 200원짜리 밥을 사 먹으며 목숨을 이어간다. 구호단체들은 『구호금으로 생활하는 부랑인들이 서울에만 9,000여명에 달한다』고 말한다.

부랑인들의 생활은 대개 유랑과 구걸 새우잠 술로 이루어 진다. 이들은 지하철 공원 역대합실 등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특별히 할 일도 의욕도 없다. 하루종일 지하철을 타고 돌아 다니는가 하면 대합실이나 공원벤치에 멍하니 앉아 새우잠을 잔다. 배가 고프면 구호 시설을 찾고 돈이 떨어지면 구걸을 한다. 식사는 대개 아침이나 점심 한끼가 전부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면 이들은 술에 젖어 든다. 800원짜리 소주 몇병과 과자 부스러기가 이들에겐 식사인 동시에 유일한 낙이다. 대부분이 알코올 중독 상태다. 『술이라도 안먹으면 어떻게 지냅니까』 세상 고민, 버리고 나온 가정, 미래, 추위, 배고픔…. 이 모든 것을 술기운으로 날려 버린다.

서울역의 거지 전모(60)씨는 『마누라가 도망간 후 같이 살던 동생과 싸우고 집을 나온』 경우이고 행려자 김모(71)씨는 『자식놈하고 다투고 집을 나왔는데 들고 나온 지갑을 도둑맞았지만 집에는 안들어 갈』작정이다.

부랑 동기는 크게 가정 불화, 사회 부적응, 정신병, 빈곤, 장애와 질병 등이다. 정신질환자가 가장 많지만 가출한 노인, 부인과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중년 가장, 실직자, 사회 생활에 좌절한 젊은이, 연고자도 없는 장애인, 전과자, 알코올 중독자 등 다양한 유형이다. 연령층도 10대 청소년에서 70대 노인까지 폭넓다. 40, 50대가 가장 많지만 60, 70대 노인과 가출한 청소년들도 있다. 여성 부랑인도 늘어나 최근에는 30%를 넘어섰다.

생활 능력이 없는 장애인이나 정신질환자, 청소년은 소위 「앵벌이」가 된다. 동냥으로 번 돈은 왕초에게 대부분 뜯긴다. 한 장애인 거지는 『식사와 잠잘 곳, 승합차로 장소 이동을 하는 대가로 왕초에게 하루 2만원을 상납한다』고 말했다. 악덕 왕초들이 고의로 불구를 만드는 일까지 있다.

한번 부랑의 늪에 빠져 들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더이상 불가능하다. 가정이나 직장으로 돌아가는 이는 거의 없다. 배고픔과 추위, 알코올로 몸은 만신창이가 된다. 정상적인 사고도 할 수 없고 일할 의욕도 체력도 사라진다. 구호단체의 도움이나 동냥이 아니면 하루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추위로 인해 손과 발은 동상에 걸려 퉁퉁 붓고 피범벅이 된다. 심한 경우 살이 썩어 들어가 손발을 절단하는 경우도 있다. 폐결핵 폐암 간경화 등 중병을 앓고 있는 경우도 많다. 길거리에 쓰러져 행려자 전문치료기관에 옮겨지더라도 병세가 조금만 호전되면 다시 거리로 나선다. 따라서 보호시설에 수용되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유랑은 계속된다. 해마다 1,000여명의 부랑인이 거리에서 생을 마감한다. 연고도 없는 시신은 화장되거나 해부용으로 의료기관에 기증된다.

◎부랑인 대책과 문제점/복지시설 절대부족 재활교육은 꿈/치료나 보호만으론 한계/‘가족회복’ 등 예방 주력해야

서울역앞을 순찰중인 한 경찰관의 말은 부랑인 대책과 관련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당국의 입장을 대변한다. 『혐오감을 줄 뿐 아니라 질서유지 차원에서도 문제가 크지요. 하지만 집도 없이 떠도는 모습을 보면 측은합니다. 수차례 설득해 시설로 보내지만 대개 몇주일을 못참고 다시 길거리로 나오고 말아요』

싸움이나 고성방가로 질서를 어지럽히고 행인에게 돈을 강요하는 부랑인들은 경찰이 일단 관할구청으로 넘긴다. 구청에서는 신상기록을 작성하고 연고자가 없으면 본인의 희망에 따라 부랑인 복지시설로 옮긴다. 이렇게 복지시설에 수용된 부랑인은 전국 42개소에 1만 3,000여명에 달한다.

그러나 복지시설이 부랑인 문제의 근본대책은 되지 못한다. 단순한 수용 이상의 의미는 없다. 먼저 부랑인들이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되돌아 올 수 있게 하는 재활프로그램이 미비하다.

직업교육은 대개 하루 돈벌이를 위한 단순노동일 뿐 기능교육은 전무하다. 예산지원이 부족한 데다 부랑인들의 자구노력도 없어 체계적인 교육이 불가능하다.

정신 질환자나 장애인 등은 전문기관에 위탁해야 하지만 해당기관이 수용능력 부족과 환자의 부랑벽을 이유로 인수를 거부한다. 시·도마다 1, 2개의 부랑인 치료병원이 있지만 재정지원 의료진 병상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건복지부가 42개 부랑인 수용시설에 배정한 연간예산은 250억원가량. 시설증·개축비와 기금, 운영비 등을 빼면 성인 1인당 월 실질생계 보조비는 9만원이 채 안된다. 관계당국도 복지시설의 문제점을 인정한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치료나 보호에는 한계가 있다』며 『가정의 정상화와 사회 부적응자에 대한 재교육프로그램 개발 등 사회구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부랑인 복지시설연합회 과장 임은경씨도 『그들을 보호시설에 수용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면서 『그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일할 수 있도록 보살피는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배성규 기자>

◎청량리 부랑인들의 대부 최일도 목사/‘200원짜리 점심’ 이젠 틀 잡혀/무료전문병원 세우는게 꿈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다일교회의 최일도(38) 목사는 아내와 두 자녀 외에도 먹여 살려야 할 식구가 200여명에 달하는 대가족의 가장이다. 청량리역 주변의 행려병자와 무의탁 노인, 노숙자, 장애인들이 모두 그가 돌보는 가족이다. 최목사가 이끄는 「다일공동체」의 자원봉사자 13명은 동대문구 전동 491 「나눔의 집」에서 매일 낮 12시30분 부랑인들을 위한 200원짜리 점심밥상을 차린다.

『부랑인들이 밥을 먹을 때마다 허리를 180도 숙여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자존심을 살려 주는 방법을 궁리하다 200원을 받기로 했습니다. 물론 빈손으로 와도 밥은 주지요』 최목사는 이렇게 모은 돈을 불우 청소년과 고아원 등에 전달하고 있다. 다일공동체는 또 매주 토요일 시내 5개대 의과대학생들의 도움으로 부랑인들을 무료로 진료하고 화요일에는 이발도 시켜 준다.

최목사가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신학대학원 재학시절인 88년. 우연히 청량리역 주변에서 굶주리며 밤을 새우는 노인과 알코올 중독자들을 보고 냄비와 버너를 들고 나가 이들에게 라면을 끊여 준 것이 계기가 됐다. 처음에는 『청량리에 거지떼를 몰고 다니는 이상한 예수쟁이가 생겼다』는 욕을 먹고 소금세례를 받기도 했지만 그는 헌신적 활동을 계속했고 89년 7월 자신의 뜻을 이해하는 교회신도 10명과 다일공동체를 구성했다. 이후 익명의 후원자와 자원봉사자도 늘어나 이제는 월 1,000∼2,000원을 보내 주는 후원자가 5,000여명에 달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쌀과 라면, 배추 등이 보내는 이의 이름도 없이 나눔의 집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날은 후원금이 들어오고…. 그래서 우리는 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계산하며 불안해 하는 일은 없습니다』

최목사는 요즘 병든 부랑인들이 무료로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천사병원」 건립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일부 재벌기업이 병원을 세워 주겠다는 제의를 해왔지만 『그러면 언젠가는 병원이 유료화, 부랑인들은 또다시 밀려나고 말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최목사는 모든 독지가에게 똑같이 100만원씩만 받겠다는 생각이다.

『부랑인은 죄인도 아니고 경쟁사회에서 밀려난 게으름뱅이도 아닙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사회의 아픔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을 자꾸만 특정시설에 격리하려 하고 백안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안타깝습니다』

그에게도 소원이 있다. 『부랑인을 위한 무료 급식소와 병원이 없어지는 날을 보는 것』이다.<유성식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