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 ‘은평마을’/18명이 2,000명 관리/전문치료 엄두도 못내/사회 적응훈련 시키지만 대다수 더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와서울 은평구 구산동의 「은평 마을」(원장 김규한 신부)은 국내 최대규모의 부랑인 수용시설이다.
현재 이곳에 수용된 부랑인은 18세 이상 남자 1,954명. 이중 약 1,300명이 정신질환자이고 나머지는 알코올 중독과 간질환 중풍 결핵 등을 앓고 있다. 하루 8,9명이 구청 사회복지과를 통해 이곳에 넘겨 지며 부랑인 단속기간에는 수십명씩 한꺼번에 들어 오기도 한다. 서울시로부터 위탁운영을 맡고 있는 가톨릭재단의 원장신부 1명, 수사 13명, 수녀 4명이 이들을 보살피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은평 마을은 새로 입소하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연고지를 조회, 가족들에게 알리지만 이들을 데려가는 것은 고사하고 면회 오는 가족도 거의 없다. 또 이들 역시 가족과의 재회를 원치 않는 경우가 많다. 이들을 돌보고 있던 한 빅토리아 수사는 취재팀의 물음에 가벼운 한숨을 내쉰다. 『가족과의 불화로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사람, 가족에게 짐이 되기 싫어 스스로 집을 나온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정신질환자는 거리에 버려지기도 합니다』
생활동 1층의 내과질환자 치료실에는 산부인과 신생아실을 연상시킬 정도로 다닥다닥 붙은 침대에 20∼70대 환자 40여명이 멍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의무담당 수사와 수녀들이 이들을 돌보고 그런대로 몸이 성한 수용자들이 환자의 옷을 갈아 입히는 등 보조역할을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전문적 치료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지하 1층의 중풍환자 병실에서는 동료 수용자가 환자들의 배설물을 받아 내고 밥을 먹여 주고 있었다.
수용자들이 은평 마을을 떠나는 것은 자유다. 가족이 찾아올 때는 물론이고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됐을 경우 본인이 원하면 언제든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떠난 사람중 상당수가 이전보다 훨씬 비참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관계자들을 안타깝게 한다. 『밖에 나가도 어차피 안주할 곳이 없는 데다 밑천이 없어 결국 또다시 부랑생활에 빠져 듭니다. 상당수가 심한 동상에 걸려 팔과 다리가 절단되거나 병이 더욱 깊어진 상태로 돌아 옵니다』 71년 입소후 25년째 이 곳에 살며 환자간호를 하고 있는 손모(70)씨의 얘기다.
은평마을은 일과 운동을 통해 수용자들이 사회로 돌아가는 훈련도 시킨다. 쇼핑백을 만드는 일을 시키고 수익금을 은행에 적립해 출소때 돌려 준다. 또 달리기 공놀이 수영 등의 운동을 어느 때나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하고 소풍과 운동회를 정기적으로 열어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고 아울러 물리치료의 효과도 거둔다. 한 빅토리오 수사는 『입소를 원하는 부랑인이 너무 많아 이 곳은 늘 만원상태』라며 『각종 질환자를 한 곳에 수용해 전문적으로 치료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왕년의 거지왕 김춘삼씨/“요즘 거지 못마땅해요”/공사판 가면 5만원은 버는데…
『옛날의 거지는 정말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거지가 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당장 공사판에 나가면 5만원씩의 일당을 벌 수 있는데 왜 구걸을 하고 다닙니까』
왕년의 「거지왕」 김춘삼(76)씨는 『요즘 걸인들의 행태가 못마땅하다』고 했다. 아직도 일을 할 수 있는데도 가정불화로 가출을 한 뒤 아무 생각없이 떠도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내가 거지생활을 하던 50, 60년대에야 무슨 돈 벌 일이 있었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구걸을 하면서도 쓰레기를 뒤지며 넝마주이를 해서 돈을 벌었고 개간·간척사업에도 참여했어요』
실제로 김씨는 60년대초 정식 대의원 대회에서 거지왕으로 「선출」된 후 전국의 거지조직을 대관령 목장 개간, 영광·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에 동원했었다. 또 당시 약 60만명의 전국 거지들이 주민등록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힘있는 사람에게 돈을 받아 내」 고아 거지들을 학교에 보내는 등 거지를 위한 사회사업도 벌였다. 그는 『지금도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양아들이 전국에 수만명이나 된다』고 자랑했다.
김씨는 현재 93년 11월 출범한 「공해추방 범국민운동 중앙본부」 총재를 맡아 나름대로 환경보호운동을 벌이고 있다. 『없는 사람도 환경보호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또 오래전 난지도에서 넝마주이 생활을 하면서 환경오염의 실상을 직접 확인한 경험도 이같은 「변신」의 한 이유가 됐다는 것. 전국에 230개 지부·지회를 두고 있고 회원은 거지왕 시절 김씨가 학교에 보내고 합동 결혼식으로 짝을 맺어준 「양자들」이 주축이다. 자체 환경감시 순찰단을 조직, 환경침해 사범을 적발해 즉석에서 시정을 요구하고 듣지 않으면 당국에 고발하는 것이 주요 활동이라고 그는 소개했다. 또 식당에 폐수 정화시설과 소각기를 보급하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12평짜리 연립주택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는 김씨는 『공백기간이 길다 보니 내가 이미 죽은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 곤혹스럽다』고 말했다. 『죽기전에 시설을 확보, 부랑인을 모두 수용하고 재활 일터를 마련해 주고 싶어요. 슬슬 정부기관과 사회단체를 찾아 다닐 생각입니다』<유성식 기자>유성식>
◎세계의 거지들/뉴욕 불쑥 손 내밀기 세계적 악명/일본 편의점서 버린 도시락 많아 ‘행복’/독일 동정심 유발 개 한마리 필수
겉모습으로만 볼 때 우리나라의 거지도 세계 수준이다. 서울 지하철역의 거지와 뉴욕 파리 도쿄(동경)의 지하철역 거지들의 모습은 거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거지가 아직 사회문제로 떠오르지 않은 반면 선진 외국의 거지는 주요한 사회문제의 하나로 다뤄진다는 데 차이가 있다.
뉴욕의 거지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다. 그들은 길거리와 지하철역 통로를 배회하다가 불쑥 행인들에게 손을 내민다. 관광객들은 흠칫 놀라 얼른 피해 가거나 아예 노상강도 쯤으로 여기고 1달러 지폐를 던지기 일쑤다. 그러나 거지와의 만남이 일상화해 있는 뉴욕 시민들은 10센트나 25센트짜리 동전을 건네거나 가벼운 농담이나 욕설을 던지기도 한다.
뉴욕의 거지들중에는 택시를 잡아 주거나 신호에 걸린 승용차 앞창에 물을 한깡통 뿌린 후 간단한 걸레질을 해 주고 돈을 요구하는 「봉사형」 거지들도 흔하다. 포트 워싱턴의 대형 수용소 등 공공·민간 구호소가 시내 곳곳에 있어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한다.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 염려는 없다. 민간구호단체 가운데는 거지출신들이 만든 노숙자연합(UHO) 같은 것도 있다.
이웃나라 일본의 거지들은 더욱 행복하다. 일본 거지들은 아예 구걸을 하지 않는다. 지하철역이나 공원 한구석에 골판지 상자로 집을 지어놓고 하루 종일 잠을 자거나 어슬렁거린다. 심지어 종일 공원에 앉아 공공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거지도 있다.
밥때가 되면 각자 「자기구역」으로 정해 놓은 편의점으로 이동해 쓰레기통 속에서 도시락을 찾아 내 끼니를 해결한다. 말이 쓰레기통속일 뿐이지 30분전까지만 해도 진열장에 버젓이 놓여 있던 도시락들이다. 일본의 도시락문화와 엄격한 유통기한 관리가 거지들에게 행복을 안기는 것이다.
올초 도쿄 신주쿠(신숙)역내에 「움직이는 보도」공사를 하기 위해 역 중앙지하도의 골판지 상자촌을 철거하기 전까지만 해도 200여 상자집이 즐비했다. 우에노(상야)공원의 벤치는 거의 거지들에 점령돼 있고 주택가의 작은 공원에도 으레 보금자리를 튼 거지들이 있게 마련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프랑스 파리 구석구석에도 거지들이 진을 치고 있다. 거리 곳곳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 손을 내미는 거지, 신호대기에 걸린 차앞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와 앞유리에 물걸레질을 하고 돈을 달라는 거지, 지하철 안에서 아코디언이나 바이올린을 켜고 모자를 돌리는 거지, 불편한 몸이나 코흘리개 아이를 「과시」하며 동정심을 짜내는 거지 등.
약 7,000명으로 추산되는 파리의 거지들은 밤이면 파리시 당국에 의해 집단 구호소로 옮겨져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받는다.
복지제도를 자랑하는 독일에도 거지는 있다. 대도시 중심가에서는 비스듬히 앉아 있는 거지들을 만날 수 있다.
찌그러진 빈 그릇 옆에 개 한마리가 같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개없는 거지는 동정심을 끌어내지 못해 벌이가 시원찮다는 것이 개 가진 독일거지의 비밀이다. 완벽한 복지제도의 틀에서 삐져 나온 인간에 대해서는 동정의 여지가 없지만 주인을 잘못 만난 개에 대해서는 동정을 느끼는 것이 독일인의 정서로 해석된다.<황영식 기자>황영식>
◎거지의 사회학/관심·배려정도가 사회수준 지표
구걸과 유랑은 유사 이래 이어져 온 인간역사의 한 부분이다. 한때 이들의 존재 여부가 곧바로 그 사회의 경제수준을 나타내던 시대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는 갔다.
오늘날 공식적으로 존재를 부인하는 중국과 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하면 지구상의 어느 나라에도 거지나 부랑인이 없는 곳은 없다. 오히려 유럽과 미국, 일본 같은 선진국에 거지와 부랑인이 넘친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존재 양식과 그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 및 배려의 정도가 사회수준의 지표가 돼 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거지·부랑인 문제도 과거와는 성격이 판이하다. 처마살이를 하거나 다리밑에서 비와 추위를 피하며 음식을 얻어 먹던 옛 거지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도회지의 지하도에 그늘로 웅크린 거지·부랑인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거지에게 남겨줄 밥은 없어도 나눠주고 싶은 마음은 지니고 살던 때가 있었지만 이젠 사회적 여력이 풍부해졌어도 그들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가고 있다. 사회적·제도적 부양책도 아직 선진국 수준과 거리가 멀다.
한국의 거지·부랑인은 경제적 여유와 정서적 빈곤, 제도적 소외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