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저녁 때 집에서 쉬다가 우연히 텔레비전 방송극을 보았다. 임꺽정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었다. 과거 벽초 홍명희의 명작소설 「임꺽정」을 흥미있게 읽었던 터라, 나는 이 사극을 관심있게 지켜보았다.그러다가 한 장면을 보고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인즉 갓 쓰고 도포 입은 양반이 장터에 나와서 상민들이 장사하는데서 물건을 탈취하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다. 사극이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배합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장면의 내용은 과거의 생활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너무도 부족했다.
원래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양반은 장터에 출입하지 않았다. 물론 양반의 특권적 신분에 편승한 횡포와 폐해가 있었으나, 그것은 장바닥에서 상인의 물건을 탈취하는 식의 작태와는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장터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한 행패나 서민 침탈행위는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아전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었다.
하지만 사극에서 역사적 고증과 시대 배경의 이해가 부실한 것이 어찌 이 한가지 뿐이겠는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근년의 우리 문학과 드라마에서 임꺽정, 장길산 같은 인물이 대중적 관심거리로 종종 등장하는데 있다.
요점부터 지적한다면 이들은 「분배의 영웅」이라 말할 수 있다. 중세의 사회체제가 심각하게 동요하던 시대에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분배의 불균형이 확대되는 가운데 나타난 군도의 설화적 이상형이 임꺽정과 장길산 홍길동과 같은 인물로 집약된 것이다.
당시의 사회가 지닌 문제성이 심각했기 때문에 이들은 도적이라는 실체에도 불구하고 분배의 불균형에 맞서 사회 정의를 구현하고자 한 영웅상으로 부각되었다. 영국의 로빈 후드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설화적 영웅형은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중세 후기문학의 현상이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이와 다른 종류의 영웅상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21세기의 개막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후기산업사회, 정보화 사회의 거센 흐름이 소용돌이치는 바로 그 중심이며, 우리가 교섭하고 살아가야 할 세계는 재래적 영토와 국경의 개념이 무의미해지는 인터넷의 세계, 문화영토의 시대다. 기업활동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전체가 이와 같은 흐름 속에 급속하게 개방화, 세계화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상황이 요구하는 것은 「생산의 영웅, 상상력의 영웅, 창조의 영웅, 공급의 영웅」이다. 그것은 현실이 필요로 하는 실제적 인간형일 뿐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호흡하는 교양과 연예의 차원에서도 새로이 발굴, 또는 주형되어야 할 새 영웅상이다. 문화는 현실의 구체적 설계가 뿌리박고 자라나는 토양이라는 점에서, 이제 종래의 영웅상인 「분배의 영웅」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새 영웅상을 창출할 수 있는 의식적, 무의식적 노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지금 우리는 고도한 기술력과 창의성 및 새로운 문화가 결합된 국민적 에너지의 재충전을 필요로 하고 있다. 문화는 박물관이나 주말의 극장, 공연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업 경영과 노사관계 속에, 개인과 소집단은 물론 국가 전체의 운명까지도 좌우하는 우리의 사고방식 속에 모두 문화가 있다.
오늘의 시대적 과제에 응답하는 생산과 창조와 공급의 영웅상을 대망하면서 우리의 문화역량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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