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폐유통·세탁 천국으로 부상한 한국/감별기·전문감식가는 턱없이 모자라고/초정밀위폐 ‘슈퍼노트’까지 등장/시중유통 100장중 1장은 가짜라는데…『지난 8월말 괌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한 은행에서 140만원을 달러로 환전했습니다. 그런데 귀국후 김포공항에서 그 때 바꾼 달러를 한화로 다시 바꾸는데 100달러짜리 1장이 위조지폐라는 거예요』
국내 은행에서 「진짜」라고 바꿔준 100달러짜리 지폐가 해외여행을 다녀 온 뒤에야 위폐로 밝혀져 당황했던 S씨의 경험담이다. S씨에게 한화를 달러로 바꿔 준 은행이 문제의 100달러 지폐가 위폐인 줄 몰랐음은 물론, 이를 시중에 버젓이 유통시킨 셈이다. 국내 은행의 위폐 무감각증을 보여준 단적인 예이다.
당국의 한 관계자는 더욱 경각심을 일깨운다. 『시중은행이 보유하고 있거나 유통중인 미화 100달러짜리 100장 가운데 1장은 위폐로 추정됩니다. 국내에서 그동안 발견된 달러 위폐는 대부분 컬러복사나 오프셋인쇄로 조잡하게 만들어진 것이었지요. 정말 큰 문제는 최근 국내에 반입돼 유통되고 있는 초정밀 달러 위폐 「슈퍼 노트」 입니다. 현재 우리 식별력으로는 사실상 적발이 불가능해요』
미국 재무부의 최근 발표도 이같은 추정을 확인시켰다. 7월10일 한국외환은행 남영동지점에 들어온 100달러 지폐 가운데 위폐로 추정되는 2장을 경찰청의 의뢰로 정밀감식한 결과 「슈퍼 노트」라는 판정을 내린 것. 외환은행은 이 2장 외에도 슈퍼 노트로 여겨지는 100달러 지폐 15장을 더 발견해 경찰청에 감식을 의뢰했다.
지난해 국내에서 적발된 달러 위폐는 모두 7만3,950달러(75건). 94년의 2만3,870달러(87건)에 비해 3배 이상, 90년의 4,000달러(9건)의 무려 18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올해는 11월말 현재 103건, 2만6,450달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국내 시중은행이 자체 능력으로 슈퍼 노트를 감별해낸 사례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중국 인민폐와 일본 엔화 등 다른 외국환 위폐도 이따금 발견되고 있으나 정확한 액수는 완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슈퍼 노트는 지질과 인쇄 상태 등이 진폐와 진배없어 위폐감별기까지 그냥 통과할 정도로 정교한 100달러 위폐다. 70년 북한으로 망명한 일본 적군파 단원 다나카 요시미(전중의삼)가 지난 3월 태국에서 위조달러 소지 및 유통 혐의로 검거되면서 화제가 됐던 「슈퍼K」가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북한 제조설이 무성한 「슈퍼K」는 지금까지 나온 위폐 가운데 가장 정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중앙정보국(CIA)은 이 위폐가 90년 레바논에서 처음 발견된 뒤 7차례의 수정을 거쳤으며 지금까지 총 10억달러 정도 인쇄된 것으로 보고 있다.
국가안전기획부 국제범죄신고센터 관계자는 『전세계에서 연간 유통되는 미달러화는 대략 3,900억달러이고 이 가운데 약 3%인 120억달러가 가짜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는 동남아 남미 등지의 개발도상국이나 중국 러시아 등 치안이 불안한 나라에서는 유통되는 달러의 10% 가량이 위폐라는 보고서도 나와 있다고 덧붙였다. 일본 경시청 자료에 따르면 아시아에서 유통되는 달러 가운데 9%가, 러시아의 경우 8%가 위폐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슈퍼 노트의 정확한 유통 규모와 실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국내 사정은 어떤가. 일본 마쓰무라사가 제작한 첨단 정밀 위폐감별기를 수입·판매하고 있는 한준전자가 최근 몇몇 시중은행 지점에서 행한 실제 시험결과는 충격적이다. 100달러짜리 100장 묶음가운데 3∼10장씩 위폐판정이 내려진 것이다. 회사 관계자는 『진폐라도 심하게 낡거나 훼손됐을 경우 위폐 판정을 내리는 감별기의 단점을 감안하더라도 시중에 유통되는 달러화중 상당수가 위폐임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수십만 달러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다.
전문가들은 조잡한 수준의 위폐 제조는 전문위조단의 소행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슈퍼 노트와 같은 초정밀 위폐는 국가차원의 관여가 없이는 사실상 제조가 불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은 중동 일부국가와 북한을 그런 후보로 꼽고 있다.
세계 각지의 암거래 시장에서 거래되는 100달러짜리 위폐의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조잡한 수준은 50달러에도 못 미치지만 진폐에 가까운 슈퍼 노트는 80∼ 90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미국 통화당국은 기축통화인 달러화의 위신이 형편없이 구겨지자 올 3월부터 종이 잉크 인쇄기술 등을 모두 바꾼 새로운 100달러 지폐를 발행하고 있다. 68년만의 일이다. 이에 따라 국제 위폐 암거래시장에서는 구권 가격이 급락하고 있고 오래지 않아 사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단기간에 처분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리나라가 위폐의 유통·세탁장소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가 위폐의 황금시장으로 부상한 요인은 많다. 우선 95년 2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외환 자유화, 금융시장 개방, 외화소지 자유화 조치 등을 꼽을 수 있다. 국민들이 현찰이나 달러화를 선호하는 경향도 한몫을 한다.
더욱이 위폐 감식능력이 수준 이하인데다 북한이 사회·경제질서 교란을 목적으로 달러위폐의 국내유통을 시도하고 있다는 정보도 있다.
현재 국내에서는 6,500여개의 은행 본·지점, 900여개의 환전소, 암달러상 등이 외환을 거래하고 있다. 시중은행에 있는 위폐 감별기는 고작 1,700여대. 슈퍼 노트를 찾아낼 수 있는 장비는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 90년 이전에 구입한 구형인데다 그나마 대부분 창고에서 잠자고 있다. 심지어 달러화는 물론, 다른 외환의 위폐여부를 식별할 수 있는 전문가도 드물다.
위폐의 정치경제적 해악은 엄청나다. 한국에 위폐가 유통된다는 소문이 퍼지면 대외적으로 「경제가 불안하고 외환이 부족한 후진국」이라는 인상을 주게 돼 우리경제의 신용도가 그만큼 떨어지게 된다. 또 외환과 원화 유통이 치명타를 맞아 안정적인 무역거래도 힘들어 진다. 위폐의 액수만큼 외환이 빠져나가는 데다 원화 가치도 손상을 입게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김성호 기자>김성호>
◎위조달러 어떻게 들어오나/무역대금·여행경비로 국내 반입 추정/위폐단 한국인에 직접 판매… 암달러상도 표적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적발된 미화 100달러 위폐는 은행환전 및 감별과정에서 몇장씩 우연히 발견된 것이 대부분이다. 또 위폐를 소지하고 있던 외국인이나 국내 무역업자들은 한결같이 『위폐인 줄도 몰랐고 어디서 받은 돈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이처럼 위폐의 첫 출처와 이를 반입한 전문조직 및 유통경로 등은 아직까지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다만 관계당국은 위폐가 범람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 및 동남아 국가가 국내에 유통중인 위폐의 주요 출처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위폐를 갖고 있다가 적발된 외국인 가운데는 이런 나라 출신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이들 나라 업체가 우리 기업에 지불한 무역대금 등에 위폐가 섞여 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국은 국외 위폐단이 비밀판로를 통해 현지 기업이나 폭력조직에 판매한 위폐가 돌고 돌아 무역대금과 여행경비 등의 형태로 국내에 들어 오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위폐단이 직접 내국인에게 접근해 위폐 판매를 시도한 사례도 있다. 이와 함께 중국 등의 위폐단이 국내 폭력조직에게 위폐의 구입을 제의했다는 첩보가 입수돼 당국이 내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11월 100달러 위폐 345장을 갖고 들어 오다 김포공항에서 적발된 K씨의 경우가 대표적 케이스.
자영업자인 K씨는 베이징(북경)체류 당시 만난 한 중국인이 『장제스(장개석)가 숨겨 두었던 1934년 발행 달러화를 발견했는데 중국에서는 환전이 안된다』며 『싼값에 팔테니 한국에 가서 환전해보라』고 유혹해 1,000달러를 300달러에 구입, 국내에서 한화로 바꿔 차액을 챙겼다. 재미를 붙인 K씨는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같은 사람에게 4만달러를 2만달러에 샀지만 이번에는 대부분이 위폐였다.
이밖에 위폐에 대한 식별능력이 부족한 서울 남대문시장 등지의 암달러상도 외국 위폐단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북한 제조설이 거론되는 「슈퍼K」는 주로 대남 공작원의 공작금으로 국내에 유입돼 나돌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국은 웬만해서는 식별이 불가능한 슈퍼K의 특성상 예상외로 거액이 국내에서 유통되고 있을 가능성을 우려한다. 한 고위관계자는 『최근 북한이 국내 경제교란을 목적으로 슈퍼K의 반입경로를 다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유럽에서 근무했던 한 상사원은 평소 알고 지내던 북한 기관원이 『슈퍼K를 많이 갖고 있으니 싸게 사라』고 노골적으로 제의해 와 즉시 한국대사관에 신고한 일이 있다. 그러나 당국은 외국에서 이런 식의 직·간접적인 유혹에 넘어 가 슈퍼K 등 슈퍼노트를 국내에 갖고 들어와 유통시킨 경우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유성식 기자>유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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