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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출제(김성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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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출제(김성우 에세이)

입력
1996.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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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비상이 걸려 있다. 대학 진학생을 가진 가정에서는 집집마다 논술 노이로제다. 이달 하순부터 시작되는 97학년도 대학입시의 본고사가 대부분 논술만으로 치러져 합격여부에 큰 변수가 된다고 해서만이 아니다. 중고등학교 학생은 말할 것없고 초등학교 어린이들까지 벌써부터 논술바람의 풍력권안에 들어와 있다. 논술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권위로 등장했다. 대관절 무엇을 위한 논술이며 논술은 어떤 것이라야 하는가.논술고사는 도입된지가 몇해 되지 않아 그 개념이나 출제방식 등이 아직 정론이나 정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불안하고 당황스럽다.

지난달 한국철학회가 논술교과연구위원회를 구성하여 96학년도 각 대학 논술고사 출제를 분석한 평가표를 공표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출제가 논술문제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5단계 평가기준에서 소위 일류대학들이 무더기로 F학점이다. F학점짜리 출제에 A학점을 득점한 수험생이 있다면 그 F×A의 셈값은 FALSE(거짓된)일 것이다. 0에는 어떤 수를 곱해도 0이다.

사실 96학년도 논술시험은 대체로 무엇을 쓰라는 것인지 출제 자체의 뜻이 아리송했다. 그래놓고 『문제가 요구하는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수험생이 많았다』는 채점총평을 내놓았다. 답안지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한 채점자가 있었는지 그것이 오히려 의문이다.

논술고사는 고교과정에서 이수한 지식수준의 바탕위에서 사고력과 논리의 전개력 문장의 표현력 등을 측정하자는 것일 것이다. 각 대학이 내놓은 채점 기준을 보면 논지의 적절성, 논거의 참신성, 어휘의 구사력 등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출제자체가 어렵다느니 쉽다느니 하는 말은 무의미하다. 96학년도 논술고사때 「출제가 너무 난해했다」는 평이 나온 것은 출제의 미스를 뜻한다. 출제자체는 고교과정까지를 정상적으로 마친 학생이면 누구나 이해하고 논급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논제는 간명하되 논평의 심도를 따져야할 뿐이다. 논술은 수학문제같은 난이도로 판별하는 것이 아니다. 종합적 사고능력의 측정이라는 명목아래 잡다한 지문을 나열하는 출제가 많지만 결국은 그것이 어떤 물음을 위한 독해력의 테스트에 지나지 않는다면 독해력은 수능시험의 언어영역 소관이다.

논술고사는 생각의 깊이와 생각하는 방법과 생각을 나타내는 기술 등 생각의 총화를 측정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 생각을 이치에 맞게 어떻게 잘 전달하느냐를 테스트하자는 것이다. 이치에 닿기만하면 그 생각이나 표현방법이 독창적일수록 좋다. 이러이러한 점을 지적해야 점수를 준다는 식으로 채점기준을 내정하는 것은 난센스다. 96학년도 서울대 출제도 출제자가 원하는 해답의 범위를 미리 정해놓고 있는 것이었다. 논술에는 주장의 정오가 있을 수 없다. 가장 우수한 답안은 출제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가장 우수한 출제는 각자가 자기만의 생각을 뚜렷하게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명쾌한 해답은 명쾌한 출제에서 나온다. 모호한 출제에 명확한 채점기준이 있을 수 없다. 분명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분명히 좋은 점수를 따는 출제여야 하고 채점이어야 한다.

우리의 논술과 비견될 수 있는 것이 프랑스의 대학입학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의 철학과목이다. 이 철학시험은 전통적으로 유명하고 가장 비중이 크다. 각계열별로 3가지 문제를 내어 그중 택일하게하고 장장 4시간 동안에 걸쳐 치러진다. 참고로 올해의 출제를 보면 이렇다.

인문계중 문학계열은 ①미래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②예술작품의 무엇이 우리를 감동시키는가 ③투표권에 관한 알랭의 저작을 논평하라. 이공계중 산업공학계열은 ①인간은 본성이 이성적인가 ②예술은 우리를 현실에서 벗어나게 하는가 ③정치권력의 역할에 관한 칸트의 저작을 논평하라.

해마다 바칼로레아의 철학시험 출제는 프랑스에서 전국민적인 관심사다. 신문에도 보도된다. 수험생뿐 아니라 전국민에게 출제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저마다 자기가 수험생인듯이 심사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같이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의 논술은 궁극적으로 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지향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국민교육의 일환 일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생각에 길들여지지 않은 국민을 생각하게 만드는데 기여하자면 논술의 출제는 정규교육을 받은 국민이라면 누구나 흥미를 가질만한 것이라야 하고 이런 양질의 출제야말로 논술의 개념을 빨리 정립하는 길이다.<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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