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도 문학에도 무방비상태이던 내게/독법·습작의 전환을 안겨준 짝사랑의 대상미안하지만, 나는 1989년 봄, 3월의 어느날 아침을 기억하고자 한다. 아니 그 전날 저녁부터 밤까지, 진눈깨비가 내렸던가 내리지 않았던가, 아니, 시작하려는 모든 말에 앞서 괄호처럼 (미안하지만)이 따라붙던 저 80년대 끝의 봄날 아침, 안개가 끼었던가 끼지 않았던가를.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언젠가부터 내 기억은 그날의 일기를 안개와 진눈깨비로 조작하고 있다. 생명력을 부여받은 기억이 스스로 왜곡되고자 하는 경향을 나는 무어라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기억의 고집이라 부를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속에 편입되어 이제는 성역이 되어버린 「샛강」의 안개 속을 거닐고 싶은 것이다.
그날, 검은 봄날(사실은 환한 봄날이었다) 아침, 누군가 기형도 시인의 죽음을 농담처럼(그렇다, 그것은 해프닝처럼 일회적이고 거짓처럼 감쪽 같은 위장술이 있었다) 귓속에 떨궈주었다. 사실이 확인되자 나는 변기에 대고 소리를 죽인 채 토악질을 했다.
기형도. 그는 누구인가. 그때까지 단 한 권의 시집도 채 갖지 않은 신예 시인이었다. 일간지 문화부 기자였으며 편집부로 옮겨간 직후, 새벽, 종로의 심야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중, 29세, 미혼이었다.
그런 그의 죽음과 나의 극한 비애 사이에는 무슨 관계-사연이 있는가? 그때나는 문학지 햇내기 기자였고, 소설 쓰기는 단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한 어수룩한 시인 지망생이었다. 그는 내가 전혜린보다 보들레르보다 직접적으로, 가까이에서, 짝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내가 대학에서 프랑스 (시)문학에 찌들어 있다가 고래뱃속 같은 세상으로 툭 떠밀려 나왔을 때 나는 세상에도 문학에도 무방비 상태였다.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오래된 서적」 밖의 문학적 스승도 친구도 있지 않았고 모든 것은 달걀 속의 생처럼 개인편향적인 은밀함만을 탐닉하고 있었다. 세상은 90년대를 위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 채 두터운 안개 속에 쌓여 있었고, 80년대의 집단적 몸짓들은 광적인 요설과 배설로 이어지는 해체의 거대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나는 안개에도 해체에도 편입되지 못한 채 맹숭맹숭하게 빈둥거리고 있었고, 실존주의 용어 식으로 「투기(project)하듯」 젊음을, 삶을 방기하였다.
그때 정면으로 맞부닥친 시인이 기형도였다. 그의 시편들은 골동품 냄새 나는 19세기 프랑스문학 아니면 집단적 운동의 대열에서 이탈된 자의 죄의식과 소외감을 신주단지처럼 끼고 살던 나에게는 언 땅에 도는 봄기운처럼 고목에 새 순을 돋게 하고 마른 도랑에 물 흘러가는 독법의 전환, 습작의 전환을 안겨주었다. 그의 시 귀절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정거장에서의 충고」부분) 처럼. 그때부터 나는 철저하게 그의 모든 것을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발표되는 시들이며, 그의 행적이 담긴 「시운동」멤버들의 소식지들이며, 신작시 메모들, 그리고 결국은 그의 죽음의 기록까지…
그해 오월 그의 시집이 나왔을 때 그에 대한 나의 스크랩 작업은, 아쉽게도, 일단락되었다. 그에게 그토록 익숙하게 따라다녔던 안개가 걷히자 90년대가 시작되었다. 그는 이른바 그동안 보아온 것 이면의 것들을 보고자 노력한 최초의 시인이었으며 90년대로의 전이를 온 몸으로 표징한 희귀한 시인이었다고 한다면 나만의 지나친 비약일까. 당대의 탁월한 비평가였던 고 김현 선생의 그에 대한 비평을 전복하는, 아니 차원을 달리 하는 또 다른 해석을 기다리는 시집을 21세기의 과제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안타까움이자 전망이 아닐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