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린 세상에 보내는 조소/“삶은 하나의 괴물/권태·환멸 가득찬 고통”/30년대 이상이 연상되는 성장소설의 90년대 발현/게다가 형식의 파괴까지그를 만나는 것은 무척 망설여졌다. 소설가 백민석. 71년생. 25세.
그러나 만나보니, 그도 평범한 20대인 것은 분명하다. 당초 우려했던 그의 소설 같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는, 적어도 외관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청바지와, 자신의 소설에 가끔 동원하는 무라카미 하루키 식의 표현대로 가벼운 윈드브레이커(바람막이 외투)를 걸치고, 귀에는 워크맨의 이어폰을 꽂았다. 손에 들려 있는 책은 뿌리깊은 나무에서 나온 「옛날엔 날 사공이라고 혔지」. 그의 소설에 늘 등장하는 동성애, 펨프의 분위기나, 언젠가 스스로를 말한 「혼종적 존재」같은 외양은 일단 아니다. 차라리 그가 즐겨 쓰는 리버풀의 네 아이들(비틀즈)에서 김건모까지의 각종 문화적 부호들에 익숙한 20대랄까.
지난해 「내가 사랑한 캔디」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그가 요즘 아주 활발하게 쓰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박물지…」 연작이다. 올 7월에 나온 문화무크지 「이다」에 게재된 「믿거나 말거나 박물지 세개」에 이어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믿거나 말거나 박물지 두개」, 「라쁠륨」 겨울호에는 역시 「믿거나 말거나 …」연작인 「지가 고양이인 줄도 몰랐대?」를 각각 발표했다. 믿거나 말거나. 20대의 우리 문화와 세상에 대한 조소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성장소설의 범주로 묶을 수 있는 것들. 50년대 손창섭, 60년대의 김승옥, 70년대의 최인호, 80년대의 장정일로 이어지는 성장소설의 90년대적 발현이다. 백민석의 소설을 늘 관통하는 것은 『삶은 하나의 불가사의한 괴물처럼 보인다』는 언술과 『그들은 운명적으로 자질구레함을 타고 났다』는 소위 신세대에 대한 인식이다.
세대가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그는 무척 껄끄러운 존재다. 김윤식 교수는 「문학사상」 12월호 소설평에서 그의 글을 두고 『30년대 스스로 다방과 바를 차려두고, 가상공연을 하면서 목숨까지 걸어보았던 저 「날개」 「종생기」의 작가보다 어느 면이 한 발 앞선 것일까』라 묻고 있다. 백민석의 글에서 이상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권태와 무료, 환멸로 가득 찬 생활세계의 논리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 그래서 삶은 항상 고통일 수 밖에 없다는 우울한 진실이 백민석의 소설적 테마』(문학평론가 김종욱) 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상상력에 바탕한 전통 소설형식의 파괴가 더해진다. 김병익씨는 『썩은 세상에 대한 속임없는 드러냄과 현란한 젊은 문체, 발랄한 감수성은 우리 전래의 문학적 풍속을 일거에 일그러뜨린다』고 말한다.
그는 서울예전 문창과 출신. 「광장」의 최인훈씨가 스승이지만 백민석은 『지금의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최교수님이 내 나이 적에 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같은 소설은 쓸 수 없을 것 같다. 분명히 존재하는, 차원이 다른 세대의 차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차라리 미국의 포스트모던 작가 커트 보니거트의 글에 더 친숙함을 느낀다. 해괴하게 비틀린 세상에, 낯선 방식으로 맞설 수 밖에 없는 젊은 이들의 고뇌, 그것이 백민석을 90년대적 소설가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의 글 한 구절.
『1960년대식 인간이건 미래 인간이건 누구나, 누구에게나, 저만의 은밀한 장난감이 하나 씩은 있는 법이다. 리모트 컨트롤, 강보에 쌓인 아기곰 인형, 이빨로 소주병 따기… 등등. 지금 누군가 자살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러한 장난감이 적어도 하나쯤은 있다는 얘기다』<하종오 기자>하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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