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풍년의 빈곤/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한국논단)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풍년의 빈곤/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한국논단)

입력
1996.12.05 00:00
0 0

◎고속성장 그늘아래 피폐해져가는 농업/이나마 살아있음은 오히려 기적 유사 이래 대풍이라는 올해 농사. 단보당 507㎏이라는 세계 최고의 생산량, 수확물 출하에 흥겨워하는 농민의 파안대소, 그리고 3% 수매가 인상으로 일단락된 1996년의 한국 농업. 이것이 아마 도시인이 한국의 농민과 농업에 대하여 갖고 있는 이미지일 것이다.

 이런 번영의 이미지는 「농업인의 날」을 맞아 예의 「생산성 10% 올리기 운동」으로 더욱 번영을 구가해줄 것을 당부했던 정부의 홍보로 한층 고조되었다.

 그런데 농촌현실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과연 이렇게 봉합되어도 되는 것인지 의구심이 난다. 이 의구심은 연례행사처럼 배추와 무밭을 갈아엎는 장면을 보면 곧 분노와 좌절감으로 바뀐다. 우루과이 라운드(UR)문제로 떠들썩했을 때는 그나마 위로가 되었겠지만 경제가 불안한 요즘에는 누구하나 거들떠 보지 않는 현실에 농민의 심정은 괴롭다. 대풍일수록 허해지는 농심과 여전히 궁색한 살림살이를 대변해줄 변변한 사회세력이 없는 것이 바로 한국의 농업이기 때문이다.

 대풍이라면 올해 이들은 얼마를 벌었을까? 농민들의 계산법에 의하면 평당 3,000원꼴. 농가당 경작면적을 4,000평으로 잡으면 일년 총매출액은 약 1,500만원 수준이고, 여기서 종자 농약 품삯등의 생산비를 빼면 순소득은 약 700만∼800만원이 고작이다. 일년 농사에 소형차 한 대를 살 수 있는 정도이다.

 식량문제는 일단 해결된다고 치면 순수익 700만∼800만원으로 교육을 비롯한 여타의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 것이 대풍을 맞은 올해 농민의 현실이다. 그래서 농한기를 틈타 도시에 허드렛일을 나가는 농민들이 증가 추세에 있다.

 농민은 최저임금법이 적용되지 않는 「생명산업」의 노동자들이며 도시의 폐기물을 정화하는 「환경산업」의 파수꾼이다. 그런데 이들을 대변해줄 사회세력이 없다고 해서 이 정도로 방치하거나 풍년잔치로 현실을 호도한다면, 농약으로 버무려진 곡식과 채소로 도시를 공격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농업은 개혁정책에서 가장 소외된 부문이다. 그동안 정부의 농업지원책이 나름대로 추진되어 정부로서도 할 말이 있겠지만, 영농자금 기계화 설비투자 등의 지원책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는 상당히 의문이다. 「생산성 10% 올리기」에 관건이 되는 농업기술의 전파나 영농후계자 육성등의 문제는 농업에 대한 사회인식과 농촌구조의 문제로 환원된다. 단적으로 말하면, 현정부의 농업정책은 세계무역기구(WTO)체제가 가동되면서 포기되었다.

 저리 융자금이 특정인에게만 전달되고 농업에 투자되지 않는 것은 상식으로 통하며, 영농기계화 정책이 그나마 아쉬운 청년인력을 설비대여업자로 전락시켰다. 작물 교체에 따르는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어 갈아엎을 것을 예상하면서도 너도나도 어제의 무와 배추씨를 뿌리고 있다. 이미 시장이 단단하게 확보된 작물은 몇종류에 불과하고 농사법을 익숙하게 알고 있는 작물도 많지 않다. 그래서 농촌에는 개혁정부에 부풀렸던 기대만큼의 실망과 좌절감이 풍년의 허망함과 더불어 조용히 퍼지고 있는 중이다.

 고속성장 속에 한국의 농촌이 이나마 살아남았음은 기적이다. 이 경우 농촌을 떠나는 것만이 유일한 해답일진대, 아직 700만명의 인구가 농촌에 살고 있다. 「신토불이」로 호소했고 이제는 「도농불이(도시와 농촌은 하나다)」로 돌파구를 모색한다. 그런데도 농가당 경작면적을 대형화하려면 더 떠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도시의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아무튼 이차산업의 그늘에 가려 꺼져가는 생명산업의 미래가 비관적으로 비치는것은 어쩔 수 없다. 전자제품의 경쟁력 향상을 위하여 농업이 희생되었던 것 만큼, 이제 도시와 산업이 농촌을 위하여 희생할 각오가 없다면 대풍 속의 빈곤과 농촌공동화를 막을 묘안은 없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