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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격분을 넘어/최상룡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화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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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격분을 넘어/최상룡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화요세평)

입력
1996.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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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벼랑끝 외교/일본의 독도 망언/‘냄비뚜껑’ 대응아닌 냉철한 전략 세울때세계가 크게 변하고 있다. 지난날 냉전이 군사력과 이데올로기로 세계를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눈 질서였다면, 오늘날 냉전 후의 세계는 지역별로 경제 안보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동북아지역에서는 아직 정부수준의 협약에 바탕을 둔 지역협력기구가 없다.

지금 한국이 당면한 최우선 과제는 경제의 번영과 내실화인데 이를 위해서는 국내는 물론 무엇보다 동북아지역의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 현시점에서 동북아 안보 경제협력을 저해하고 있는 중대한 요인은 일차적으로 북한체제의 불안정이요, 그다음으로는 일본이 동북아지역 국가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북한이 이 지역 안보에 위험요인이 되는 한 참다운 의미의 동북아 협력기구의 성립은 어렵다.

그리고 사실상의 엔블록 형성으로 경제면에서 동북아지역의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일본이 정치 안보면에서 그에 상응한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인식에 있어서 최소한 한국과 중국의 신뢰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북한은 경제의 궁핍과 벼랑끝 외교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우리와 역사인식을 공유할만한 중심정치세력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끈질기게 북한과 일본의 인식변화를 유도해 나가야 한다. 북한과 일본은 그 객관적 역할은 전혀 다르나 우리가 다루기 어려운 까다로운 대상이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국민정서만 생각하면 북한과 일본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가장 손쉽고 안전할지 모르나 문제는 그러한 태도만으로는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데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북한과 일본에 대해서 「냄비뚜껑」식 대응만 해야 하는가. 이제부터는 부질없는 환상과 격분을 넘어서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국가이익의 관점에서 냉정히 접근해 나가야 한다. 우리 정부는 한때 북한에 대해 환상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북한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막연한 기대를 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정치적 미숙이지만 남쪽에서 열린 정책을 쓰면 북쪽에서도 어느 정도의 화답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그 환상이 나쁜 의도에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잠수함 침투사건 이후 정부 민간 할 것 없이 북한에 대한 강경자세를 요구하고 있고 우리가 북한의 직접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명분론이 또다른 환상을 초래하지 않을까 두렵다. 좀처럼 사과나 재발방지를 보장하지 않겠지만 설령 북한이 미국을 통하여 유감의 표시로 해석될 수 있는 메시지를 보낸다고 해서 그것이 참다운 사과나 재발방지가 된다고 생각하면 이는 더 큰 환상이 되기 때문이다. 대북정책은 상황에 따라 강경할 수도 있고 온건할 수도 있다. 문제는 북한의 대남통일전선 전략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우리가 일본을 다룰 때도 마찬가지다. 명백히 독도는 우리 땅인데 기회있을 때마다 일본정부가 망언을 하니 우리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고 분통이 터진다. 그러나 실제로 독도문제는 잘못 다루면 한일양국을 적대국으로 갈라놓을 만큼 심각한 영토분쟁의 씨앗이 되어 있다. 심지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우리를 지지하고 자국정부를 비판해온 양심적인 일본인들까지도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해결하자고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독도망언이 결코 각료사임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북한과 독도문제는 현시점에서 우리쪽이 유리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현명하게 대처만 하면 잃을 것이 없다. 지금 우리가 취할 태도는 북한에 대해서는 남북한 당사자 원칙, 일본에 대해서는 역사인식의 공유를 고수하되 사안별로는 실용적 유연성을 가지고 대처해 나가는 것이다.

국제관계에서 중국인은 대체로 전략적 오류를 범하지 않고 일본인은 「무전략」같이 보이지만 챙길 것을 다 챙긴다. 전략없는 전술은 뒤죽박죽이 될 수 밖에 없다. 1996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동북아에서 우리의 전략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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