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등장은 마치 혜성의 출현과 같았다.71년 7월15일 헨리 키신저 박사가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함께 3일간의 중국 잠행 결과를 발표했을 때 온 세계는 경악했다. 그리고 단지 대통령의 참모중의 하나로 여겼던 이 48세의 유대인을 괄목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존의 틀을 부수는 「신전파괴자」의 모습을 보이며 그 주목에 값했다.
키신저의 구상대로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미소양극체제는 세력에 바탕을 둔 미중소 3극체제로 바뀌었다. 그는 외교방식에도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대기자 제임스 레스턴에 「등잔밑 낙종」을 안겨준 「베이징(북경)비밀외교」는 월남 종전협상에서도, 중동협상에서도 리바이벌됐다. 그 때 한국의 한 신문만평이 빗자루를 타고 나는 키신저 모습을 그려놓고 「귀신저」라고 불렀던가.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이란 직책은 그의 베이징밀행 당시 부통령을 바람잡이로 내세운 것으로 인해 부통령과 대통령 사이의 직책으로 「격상」됐다. 각국은 다투어 안보특보를 신설하고 키신저류의 비밀·쇼크 외교를 흉내내느라 바빴다. 80년대 중반 또 다른 「외교 삼손」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등장할 때까지 그는 단연 국제외교무대의 「유행」을 지배하는 스타였다.
그런 키신저가 후임 국무장관으로 거론 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빌 클린턴 행정부가 2기출범을 앞두고 대중·대북한 외교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을 국제무대로 끌어들여 소련을 견제한 키신저가 새 외교조타수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키신저 외교가 나폴레옹전쟁 이후 빈체제를 이끈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세력균형외교」의 부활임은 주지의 사실. 클린턴의 낙점여부와는 관계없이 키신저가 거론된다는 것은 그가 「메테르니히」를 부활시켰듯 클린턴이 중국을 다루고 북한 끌어내기위해 「키신저」를 부활시키려는 시사는 아닐까.
문제는 「키신저」의 피해자가 미국의 약소 우방이었다는 사실. 「귀신저」의 새틀이 짜여졌을 때 월남은 지상에서 사라졌고 대만은 외로운 섬나라로 전락했다. 미국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다른 선택은 없다라는 명제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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