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내가 환갑을 맞는 해였고 가야금을 배운지 45년, 작곡을 시작한지 약 35년 되는 해였다. 그래서 전국 5개도시를 순회하면서 그 지방의 가야금 주자들과 함께 나의 가야금 창작곡을 연주하는 음악회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11월17일 서울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황병기 창작음악 35년」이라는 음악회를 가졌다.이 여섯 차례의 음악회에 매번 많은 청중이 와서 뜨거운 성원을 해주어 참으로 흐뭇했다. 특히 서울 음악회에는 워싱턴과 도쿄(동경)에서까지 들으러 온 사람이 있었고 폴란드의 바르샤바대학교 한국학과에서는 교수 및 학생 일동의 명의로 축전까지 보내왔다. 음악회를 모두 마치고나니 가야금과 함께 한 지난 45년의 세월이 가슴 속에서 한 바퀴 돌아가는 듯한 감회를 갖게된다.
내가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한 1951년 무렵은 한창 전쟁 중이어서 국악이 사회적으로 망각되어버린 듯한 시절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부산 대신동에 피난온 천막 중학교에서 가야금을 배웠는데, 주위에서는 이러한 가야금 공부를 괴짜짓으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웃기까지 했다.
그 당시는 저 학생이 왜 피아노를 배우지 않고 가야금을 배우느냐고 의아해하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왜냐하면 가야금은 악기라기보다는 한낱 골동품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피아노와 감히 비교한다는 발상조차 갖기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이화여대의 천막강당에서 국립국악원 최초의 국악공연이 열렸는데, 거기서 나는 손님 안내를 했다. 지금도 그 연주회 풍경이 며칠 전의 일처럼 눈에 선하지만, 지금 나는 그 음악회가 열렸던 이화여대 국악과의 노교수로 있는 것이다. 그 당시 어찌 나의 앞날을 땅뜀이나 했겠는가.
1959년에 서울대에 국악과가 창설되자 최초의 가야금 강사로 출강하게 되었다. 당시 국악과 창설은 거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대학에 국악과라니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며 거기를 졸업해서 무엇한다는 말인가라는 사회적 시선을 따갑게 받았다. 심지어 얼마 안가서 폐과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감돌았다.
그러나 60년대부터 우리 음악은 여러가지 면에서 호전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그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는 국민의식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한편 우리 시대의 새로운 국악을 창작하려는 기운이 일고 이에 힘입어 국악관현악단이 창설되기 시작했다.
또 국악의 해외연주가 빈번해지면서 우리 전통음악의 독창적인 예술성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70년대에 한양대와 이화여대에 국악과가 설치되고 80년대부터는 국악과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현재 20여개 대학에 국악과가 있다. 또한 그 졸업생들이 인적 자원이 되어 전국적으로 30여개의 국악관현악단이 생겨났다.
그런데 국악관현악단 공연에서 청중의 대부분이 젊은 층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나의 순회 공연에서도 무대 뒤까지 몰려와 초롱초롱한 눈으로 인사하는 10대 청소년들이 유난히 반가웠다. 내가 가야금을 배우던 시절과는 정말 금석지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환갑이 무슨 늙은 것이냐, 아직도 젊다는 덕담을 주위로부터 꽤 듣는다. 하기야 90년에 평양을 방문했을 때는 「60 청춘, 90 환갑」이라는 김일성의 말을 표어처럼 부르는 소리도 여러번 들었다. 그러나 나는 나이 든 사람이 젊은이처럼 보이는 것이 별로 탐탁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나이 든 사람은 나이 든 사람다워야 좋은 것 같다. 어릴 때 우리 집 병풍의 신선도에서 보았던 할아버지들 같은 사람이 그립다. 내 외손녀는 가끔 공중을 응시하다가 『나는 말이 되고 싶어』하고는 갑자기 엎어져서 힘차게 뛴다. 나는 『할아버지도 말이 되고 싶다』고 외치며 그 뒤를 따라잡곤 한다. 묵은 해를 돌아보며 새해에는 늙는 맛이 더욱 삼삼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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