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근절될 줄 모르는 부정부패를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의문이 생긴다. 대관절 그 썩은 냄새 나는 돈을 어디 쓰겠다고 그렇게 악착같이 모아대는가. 깨끗한 돈이건 더러운 돈이건 돈이란 많을수록 행복하기만 한 것인가. 사람 사는데 얼마만큼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인가. 없으면 없는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대로 살아가는 지혜는 남의 돈을 부정하게 챙기는 지혜보다 덜 지혜로운가.사람이 왜 부를 원하며 무작정 부하기만하면 되는가에 대해서는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에게 한번 물어보자. 명저 「국부론」의 저자인 그는 앞서 「도덕 감정의 이론」이란 책을 써서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통해 부의 바탕을 먼저 해부했다. 고전은 그 사상이 어느 시대에나 변색하지 않으므로 고전이다.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사람은 계층적인 사회속에서 부와 지위와 명예를 찾아 서로 경쟁한다. 그중에서도 부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사람의 행복은 건강하고 빚이 없고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으면 더 아쉬울 것이 없다. 이 정도의 행복은 하층 노동자의 임금으로도 이룰수 있다. 그러면 왜 그 이상의 부를 원하는가. 부가 가져오는 안락이나 쾌락도 있지만 여러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다. 부는 사람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수단이다. 그런데 부를 획득하기위해 보다 효율적인 수단을 강구하는 사이에 부의 획득 자체가 목적처럼 되어버린다. 수단이 목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대중은 상류 사람들의 생활을 거의 완전한 행복의 상태로 생각하기 쉽다. 부자를 부러워하고 가난한 사람을 경멸하는 성향이 도덕적 감정의 부패의 원인이다. 「재산을 탐내는 사람들은 너무 쉽게 도덕성을 팽개친다」고 애덤 스미스는 말했다.
1970년대에 들면서 「경제학의 위기」라는 것이 나타났다. 부의 생산에만 골몰해온 인간이 무엇을 위한 부냐라는 회의에 젖기 시작하면서 경제학은 경제 성장에만 주력해 부의 목적이나 내용을 등한시해 왔다는 반성이었다. 이 위기의 시대에 경제학은 원점으로 돌아가 애덤 스미스를 찾고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각자가 무엇을 위한 부냐를 새삼 생각할 때다.
지난날에는 부자라면 그 자체가 지위였고 명예였다.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이 울산 공업지구 기공식에서 『빈곤에 허덕이는 겨레 여러분!』하고 치사를 시작했을 때만해도 부는 권력이었고 권위였다.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의 시대가 되고 불의의 부와 불로의 부가 판을 치는 지금은 부 자체가 사회적 계급장이나 훈장은 아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의 부일 것인가.
돈은 인간에 의해 발명된 것중 가장 위대한 자유의 수단의 하나다. 돈만 있으면 웬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 있다. 이 선택의 크기가 자유의 크기다. 부의 성장은 자유의 신장이다. 자유롭고 싶어 돈을 번다.
그렇다면 얼마만한 자유가 필요한가. 자유는 무조건 많기만하면 좋은 것인가. 돈도 무조건 많기만 하면 좋은 것인가. 자제없는 자유는 방종이다. 과도한 자유는 자유 자체를 자해한다. 마찬가지로 절제없는 부는 타락으로 흐른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부의 방종시대다.
서민들의 눈을 자꾸만 위로 위로 치켜 뜨게하는 것은 졸부들의 허세다. 이들이 부러워 흉내내고 싶은가. 이들의 바람만 가득 든, 풍선처럼 들뜬 가슴을 아는가. 헛되게 번 돈의 허망과 무엇으로도 달랠길 없는 부픈 배의 허기를 아는가. 꿈도 보람도 없는 무료한 나날의 실미를 아는가. 이 동취보다 더 메스꺼운 악취는 없다.
수 놓은 비단침대 위에 눕는다고 해서 평범한 방바닥에 누울 때보다 심한 열이 더 빨리 내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고대광실에 오히려 우환이 많다. 과욕과 염담이 가장 좋은 섭생법이다.
정말 내가 많은 돈이 왜 필요한 것인지 각자 다시 자문해보자. 이제 부자는 돈있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돈 있다고 부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허식과 허영심을 위한 비용이 아니라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고 멋 있게 사는 데는 과히 많은 돈이 들지 않는다. 부란 만족할줄 아는 지족으로 족하다. 검약하면 모자람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부정의 손을 내밀고 있어야할 까닭이 없다.<본사 논설고문>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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