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했던 60년대 유학시절/아내 그리며 읊조리던 시/지금도 그 노래 들을때면 시인의 상심 가슴깊이 와닿아사람은 대개 젊은 시절 한때 시인을 꿈꾼다. 그래서 시와 등지고 사는 것 같은 사람이라도 우연히 시상이 떠오르면 잠시나마 메마른 정서를 추스리게 된다. 박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은 5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나의 쓰라린 기억에 가끔씩 묘하게 오버랩된다. 어느 때는 과거의 한부분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시를 언제 처음 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60년대초 스위스에서 유학할 때 아내가 그리우면 가끔 떠올리던 시구이다. 당시는 아무리 신혼이라해도 부부동반유학은 꿈꿀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물질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인지 「세월이…」처럼 낭만이나 우수가 짙은 시들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박인환 시인은 특히 전후 폐허의 도시에 깔린 우울과 불안을 세련된 감각과 높은 지성으로 달래주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의 한 사람이었다. 광복 전 요절한 「날개」의 이상처럼 어두운 시대에 오로지 시속에서 살다간 비극의 시인이다. 그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목마와 숙녀」에서 「상심한 별」이라든지, 「불이 보이지 않는 등대」라는 표현으로 시대의 비극적 상황을 쉽사리 벗어날 수 없음을 한탄했다.
「세월이…」에서는 삶의 가치를 상실하고 방황하는 시대 속에서 따스한 인간애를 애타게 갈구하며, 사랑의 정을 나누던 「유리창 밖 가로등」 「가을의 공원, 그 벤치」의 추억을 간절히 간직하고 싶어했다. 그밖에 여러편의 수작에서 보여준 수많은 시어의 정수는 아직까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여린 가슴을 쓰다듬어 주는 듯하다.
더구나 「세월이…」는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도심의 한 주점에서 문학과 술로 시대의 아픔을 달래던 박인환이 죽기 얼마전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라 한다. 특히 이 자리에 있던 친구 이진섭이 곡을 붙이고 누군가 즉석에서 노래를 불러 알려지게 됐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나온 노래 역시 애잔한 샹송의 멜로디로 듣는 이의 가슴에 깊이 닿아 널리 애창되고 있다. 나도 음악을 좋아하고 가곡을 즐겨 부르는 편이라 이 노래를 잘 알고 있지만, 남 앞에서 불러본 적은 없다. 그러나 낙엽 진 골목 어귀를 터벅터벅 걸으면서 허밍해보거나 서재에 홀로 묻혀 지긋이 눈감고 읊조린 적은 많다. 그 때마다 시인의 상심한 아픔이 가슴속으로 스며들면서, 어려웠던 시절 그리운 추억의 편린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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