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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교육에 ‘예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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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교육에 ‘예술’이 없다

입력
1996.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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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교양과목에 얽매여 부족한 실기는 학원·과외로 메우고/소질보다는 ‘만들어진’ 전공자들/음대생 10%만이 졸업후 활동/게다가 편가르기·고액레슨까지…/왜곡된 교육·입시·풍토에 위대한 예술가가 탄생할 수 없다한국은 예술가 지망생에겐 척박한 땅이다. 예술적 재능과 개성은 학맥에 짓눌려 꽃피기도 전에 시들어 버리기 일쑤고 돈과 줄이 대신 빛을 발한다.

왜곡된 예술교육과정과 입시제도, 사회풍토 등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예술계를 황폐하게 하고 있다. 예술계 원로들조차도 『국내에서는 세계적인 예술가가 나오기 어렵고 발붙이기도 힘들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예술교육은 공공 교육기관에서보다는 사설학원과 개인교습소에서 주로 이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문예술교육기관으로 예술계 중·고등학교가 있지만 이 또한 대학입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예고의 경우 전체 수업시간의 60%는 일반 학과목을 가르쳐야 한다. 실기는 학원교습이나 과외를 통해 습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설학원이나 개인교습소의 교육내용도 의심스럽다. 음악학원에 음악전공자는 있지만 작곡이나 성악 전공자가 피아노를 비롯한 악기연주를 가르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음악전공이 아닌 사람이 버젓이 강사로 일하기도 한다.

예술계 중·고등학교와 사설학원에서 예술 전문교육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 것이다. 서울예고 김덕준 교감(54)은 『예술교육을 목표로 한 특수목적고라고는 하지만 일반학과목 60%, 전문교과목 40%씩 수업배정을 하다보니 학교교육으로는 둘 다 충족시키기 어렵다』고 말했다.

예술계 중·고등학생의 조기유학이 갈수록 늘고 있는 것도 상당부분은 그 때문이다. 중학교 과정인 예원학교의 경우 지난해 3월부터 올해 2월까지 유학을 떠난 학생은 20명이었다. 그러나 올 3월부터 10월말까지 벌써 30명이 떠났고 현재 유학준비를 하고 있는 학생까지 합치면 2학기가 끝나는 내년 2월까지는 40여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이 학교 K교사는 『2, 3년전만 해도 장차 대학에 들어갈 실력이 안돼 떠나는 도피성 유학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반에서 1, 2등을 다투던 학생들이 나가는 추세』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예술교육은 수준 낮은 사설학원에서 출발해 입시 올가미에 걸려 있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거쳐 대학에 들어갔을 때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예술교육이라고 할 만한 것은 대학에서나 시작되지만 대학교의 교육과정도 전문 예술인을 양성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음·미대가 전체 대학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김귀현 교수(여·기악)는 『교양과목이 전체학점의 30%를 차지하고 실기과목 가운데서도 전공과 무관한 것이 많다』며 『각 대학의 예술관련 학과들이 차별화 해 있지 않아 연주가를 양성하려는 것인지 이론가를 양성하려는 것인지를 구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음·미대에는 음악가나 미술가가 되겠다기 보다는 우선 졸업장만 따면 된다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 한국예술연구소 김춘미 소장은 「만들어진」 전공자가 많은 것이 큰 문제라고 말했다. 『예술 전공자 가운데는 별 소질이 없는데도 부모의 권유와 훈련으로 만들어진 전공자가 많아요. 눈곱만큼의 소질만 있다 싶은 학생이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하루아침에 전공자로 둔갑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예술가 배출구조는 외국의 피라미드형과는 정반대로 역삼각형을 띨 수 밖에 없습니다. 외국에서는 어려서부터 취미활동으로 음악 미술을 한 뒤 전문학교나 대학은 전문예술가 지망생들만 가는데 비해 우리나라는 대학으로 갈수록 수가 늘어나 결국 예술가 공급과잉을 빚는 겁니다』

그래서 음·미대를 졸업하고 예술가의 길을 걷는 사람은 소수에 국한된다. 한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연간 4,000여명에 달하는 음대 졸업생중 전문 예술활동을 하는 사람은 10% 수준에 불과하다. Y대 음대생 K씨는 『대학에 가기 위한 수단으로 음·미대를 선택하는 학생들 때문에 정말 예술대학에 들어와야 할 학생들이 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예술계 대학 정원을 줄이자는 목소리도 높다. 음악평론가 탁계석씨는 『서울대 음대가 전국의 음대생과 예고생, 학부모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정원 축소에 찬성하는 응답자가 42%로 반대 18.8%보다 훨씬 많았다』고 전했다.

또 예술계 대학 교수들의 「내제자, 네제자」식 편가르기 때문에 실력있는 학생이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연세대 하재은교수는 『음대는 도제관습이 뿌리깊어 자기 제자를 우선하는 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미술·무용계도 출신학교별로 분류하는 것이 보편화해 있고 작품세계와는 무관한 「누구는 내제자」식의 편가르기가 공공연하게 행해진다.

실기 레슨비가 턱없이 비싼 것도 문제다. 대학 교수들에게 보통 30∼40분, 기껏해야 1시간 레슨을 받는데 15만원을 낸다. 거기에 「새끼 강사」에게도 5만원씩은 바쳐야 한다. 외국에서는 A급 강사에게 레슨을 받아도 시간당 8만원 안팎이다. 「예술=돈」이라는 등식이 이래서 생긴다. 예술적 재능보다는 돈이 있어야 예술을 할 수 있다는 한탄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이강숙 교장(62)은 영재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예술전문인력을 양성하려면 예술적 소질을 가진 꿈나무를 조기에 찾아내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높은 수준의 특수교육을 해야 합니다. 시작과 끝이 같은 고리로 엮어진 일직선상의 교육이 필요하지요』

우리나라에서 발레나 현대무용 등에서 국제적인 스타가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초등교육의 부재가 결정적인 것으로 지적된다. 무용평론가 문애령씨는 『미국이나 유럽의 발레리나는 8세때부터 발레스쿨에서 키워진다』며 『어릴 때 체격조건과 재능을 보고 입학자격을 엄격히 제한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체격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발레를 전공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이교장은 전체적으로 국내 예술교육기관의 경쟁력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학생들의 재능을 살리기 위해서는 음악중·고, 미술중·고 등 분야별 전문교육기관이 있어야 하고 졸업생은 음악원에 가고 음악원 졸업생은 국제 콩쿠르에 입상해 음악가로 인정받는 체제가 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년 교육시장 개방과 함께 외국의 예술학교들이 몰려 오면 어려움에 처할 예술교육기관들이 속출할 것입니다』<이진동 기자>

◎교수직 내놓고 미로 돌아가는 피아니스트 백혜선씨/“한국은 예술가에 불모의 땅”/획일화한 연주풍토·안일한 교수사회 등 숱한 걸림돌

『한국풍토에서는 세계적인 예술가가 나올 수도, 발붙일 수도 없습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혜선씨(31)는 최근 힘겨운 결단을 했다. 작년에 어렵게 자리를 잡은 서울대 음대를 떠나 유학했던 미국으로 되돌아 가기로. 표면상의 이유는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지만 실은 국내에서 연주활동과 교수활동을 함께 하는 것이 무리라는 판단 때문이다. 대학측은 휴직처리를 해주겠다고 하지만 그가 다시 돌아오게 될지는 미지수로 남아 있다.

그에게서는 고뇌의 흔적이 역력했다. 『우리의 예술풍토는 더이상 악화할 수 없을 만큼 악화했어요. 국내에서 음악에만 전념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깨닫게 됐습니다』

그는 짧은 기간 대학에 뭔가 새바람을 일으키려고 애도 써 보았지만 결국은 실망이 컸다고 털어 놓았다. 『음대생 10명만 제대로 가르칠 수 있어도 보람을 느끼고 눌러 앉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됐어요. 음대 1, 2년생의 경우 교양과목 수강 때문에 하루 전공실기 시간은 3시간도 안돼요. 그러니 어떻게 훌륭한 연주가가 나올 수 있겠어요. 예술교육은 뒷전이고 대다수 학생이 대학입시와 대학자체의 존립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어요』

탄식은 이어졌다. 『외국에서 공부한 실력있는 음악가들이 돌아왔다가도 90% 이상은 다시 떠나려고 해요. 보다 정확히 말해 이름있는 음악가는 아예 들어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그를 실망시킨 것일까. 『어느 대학 할 것 없이 음악활동은 제쳐놓고 자리지키기에 급급한 교수들이 많아요. 워낙 교수자리 잡기가 힘들어선지는 모르지만 교수만 됐다 하면 그자리에 안주해 버려요. 물이 고여 있으니 결과가 어떻겠어요. 학교경력과 연주경력이 교수선발 기준이 돼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돈으로 연주경력을 살 수도 있어요. 돈이 없으면 연주회도 못열지요. 이벤트사가 음악적 재능보다는 연주회 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다니기 때문이에요』

그는 예술발전의 최대걸림돌로 획일화한 예술풍토를 들었다. 『예술은 곧 개성인데 우리사회는 「튀는 사람」을 일단 배척해 버려요. 그러니 개성을 꽃피울 수 없는 거지요. 비평·언론계에도 애호가는 많지만 「보는 눈」을 가진 전문가가 드물어요』

한가지 제안도 내놓았다. 『미국에서는 줄리아드, 커티스, 뉴잉글랜드음악원 등 쟁쟁한 학교끼리 자매결연을 맺어 학생들이 여러 학교의 교수를 찾아 다니며 다양한 스타일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습니다. 우리도 서울대 연대 등과 예술종합학교가 서로 교류하도록 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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