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당 수십만원까지/명문·사립교 더 기승/학부모 대표가 통장관리/기밀유지 단속 힘들어학부모는 봉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학부모는 학교측의 끊임없는 찬조금 요구에 시달려야 한다. 보충수업비와 자율학습비는 기본이고 운동회비, 소풍비, 학습기자재 및 시설비에다 심지어 교사 연수비, 회식비까지 모두 학부모에 부담시키는 일이 드물지 않다.
찬조금의 종류는 보통 학교마다 10가지가 넘고 찬조금별 모금액수는 명목에 따라 1인당 수만원에서 수십만원에까지 이른다. 이런 찬조금은 대개가 불법이다. 현행 기부금품 모집규제법에 따르면 학교는 어머니회 학부모회 후원회 등 의 회원들이 내는 자발적 기부금만 받을 수 있다. 또 기부금은 반드시 학교 서무과가 접수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교는 교장이나 학년주임, 담임교사 등이 학급간부 학부모나 후원회원 등을 선정, 일정액을 할당해 사실상 찬조금을 부과한다. 이 경우 학부모 대표를 매개로 학교측과 학부모 사이에 은밀한 주고받기가 이뤄져 모금사실이 좀처럼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용처 역시 불분명한 것이 태반이다. 일부 학교는 대담하게도 전체 학부모에게 찬조금 고지서를 보내기도 한다.
학부모들도 이같은 모금행태가 불법임을 알지만 선뜻 이를 거부하지 못한다. 외부에 알리거나 학교측에 시정을 요구하기는 더욱 어렵다. 행여 그때문에 자녀가 학교에서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찬조금 비리가 없는 학교가 드문 상황이지만 이런 연유로 좀체 법망에 걸리지 않는다.
감사원과 서울시 교육청에는 부당한 찬조금 모금을 고발하는 학부모들의 진정서가 올해만도 200건이상 접수됐다. 그러나 진정인이 신원을 밝히지 않아 명확한 실체가 규명되지 않은 채 겉핥기식 조사가 진행되고 유야무야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취재팀의 확인 전화를 받은 서울 목동 S고교의 한 진정인은 깜짝 놀라며 『제발 내가 진정서를 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사정을 했다. 불법 찬조금에 분개하면서도 자녀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학부모의 곤혹스런 심정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부당 찬조금은 세칭 명문교와 당국의 감시가 상대적으로 허술한 사립학교에서 더욱 기승을 부린다. 경기 부천의 한 중학교 학부모회 간부는 『이런 불법적인 행태는 하루빨리 사라져야 한다』며 자신이 관리하는 회비의 은행구좌와 올해 사용내역을 취재팀에게 공개했다. 이 학부모는 『지난 4월초 학교측의 요청에 따라 학급별로 3∼5명씩 55명의 1학년 학부모 회원들로부터 10만원씩 총 550만원을 거둬 내 개인구좌에 넣어 관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중 스승의 날, 운동회, 소풍 등 행사때마다 학년주임이 요구하는 일정액을 학교에 내고 있다』면서 『필요 액수는 그동안의 관행에 따라 정해졌다』고 말했다.
그가 취재팀에 밝힌 사용내역에 따르면 4월부터 이달까지 23번이나 학교에 찬조금이 전달된 것으로 나타나 학교측의 요구가 얼마나 빈번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또 이 돈은 순수한 행사비용이 아닌 교사들의 식대, 선물비 등으로 주로 사용됐고 교장의 지방출장 보조비로 사용된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이 정도는 학부모의 부담이나 모금의 「강압성」 측면에서 그리 심한 경우라고 하기 어렵다. 서울 M초등학교의 한 학부모. 『올 1학기초 학교가 나를 학부모회 부회장으로 선임하고 50만원의 찬조금을 요구해 왔어요. 형편이 안된다고 거부했더니 바로 다음날 아들의 담임교사가 직책 반환을 종용했어요. 결국 돈을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울 S여중의 한 학부모는 『담임교사가 선정한 어머니회 회원 10명이 각각 20만원씩 찬조금을 내기로 했다는 반장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딸의 학교생활에 지장이 있을까봐 20만원을 어머니 회장 구좌에 입금시켰다』며 구좌번호를 제시했다. 이 학부모는 또 『지난해에는 육성회담당인 학생주임의 요구대로 30만원을 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학교측은 『찬조금 모금에 학교가 개입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찬조금 액수와 명목은 교장 또는 주임교사와 어머니회 학부모회 후원회 간부들이 상의해 정한다. 일단 액수가 정해지면 학교측은 이들 간부를 통해 일반 학부모들로부터 기부금을 받는다. 자발적 기부라는 형식을 갖춰 단속망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조성된 찬조금이 억대를 넘는 학교도 있다. 서울 D고교는 지난 여름 에어컨 설치비 등의 명목으로 학급 임원단 학부모에게 1, 2학년은 한 학급당 300만원, 3학년은 400만원의 찬조금을 거둬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면서 학교측은 대상 학부모들로부터 절대로 이를 발설하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받았다.
아예 모든 학부모에게 부당 찬조금을 요구한 사례도 있다. 지난 7월 서울 중계초등학교에서는 체육관 건립 명목으로 전 학부모에게 기부가능 금액을 적어내라는 백지 고지서를 발송했다가 학부모들의 집단반발로 이를 백지화하기도 했다.
찬조금비리는 유치원도 예외가 아니다. 상당수 사립유치원이 모든 원생을 대상으로 간식비 교재비를 따로 걷고 있다. 서울 S유치원의 경우 분기당 수업료 30만원 외에 식비와 교재비 등의 명목으로 40만원의 잡부금을 받는다. 이 유치원 교사 K씨는 『처음에는 식비와 교재비가 수업료에 포함돼 있었으나 9월부터 원장의 지시로 이를 별도로 부과하고 있다』고 말했다.
◎찬조금 어디에 쓰이나/비공식 수당·개인전용 등 자의적 사용 철저히 ‘베일’
학교 찬조금의 사용처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학교가 찬조금을 학교의 공식예산에 편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모금과정 자체가 불법이니 이를 떳떳하게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찬조금을 집행하는 교장 교감 교무주임 학년주임 등 학교 핵심간부 외에는 누구도 정확한 사용내역을 알수 없게 돼있다. 명목에 따라서는 억대에 이르기도 하는 거액의 찬조금이 아무런 감시를 받지 않고 몇몇 사람에 의해 자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때문에 전용과 상납 등 비리가 생겨난다.
서울 S여중의 한 어머니회원은 이렇게 밝혔다. 『지난 7월 학년주임이 어머니회에 복사기 기증을 요청해 회원당 10만∼20만원씩 거둬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학부모회도 복사기를 기증했고 1학년의 한 학부모도 복사기를 사주었다는데 학교의 복사기는 1대뿐이었습니다. 당장 학교측에 결산보고서를 내놓으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이를 학교에 맡기고 있는 입장에서 그럴수도 없었어요』
관련 결산자료를 학부모에게 공개하는 학교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부모들이 이를 엄밀하게 심사할 만한 전문적 지식이 없는데다 시시콜콜 따지고 들기 어려운 처지여서 대부분 형식에 그치고 만다. 물론 교육청도 찬조금 지출내역을 감사한다. 그러나 상호 순환근무를 하는 교육청과 학교서무과 직원들의 밀접한 인간관계 때문에 감사가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운 현실이다.
서울 S고교는 교내 온수기 설치비 명목으로 학급 간부들의 학부모에게 15만원씩을 거둬 온수기를 설치했으나 그 비용은 이미 학교 예산에서 전액 지출된 것으로 알려져 전용 의혹이 일고 있다. 또 재력가인 학부모가 에어컨을 학급마다 무상으로 설치해 주었는데도 학교측이 별도의 찬조금을 걷다가 학부모의 반발을 산 D고교도 비슷한 경우이다.
서울 B여고는 10년전부터 학년주임의 주도로 3학년생 전원에게 3,000원의 졸업기념품비를 거두고 있으나 정작 학교에는 졸업생들의 기증물품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동문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93년에는 3학년 주임이 이때문에 문책을 받아 주임직을 그만두기도 했으나 아직까지도 시정되지 않고 있다.
경기 고양의 H초등학교에서는 운동회때 교장이 교사의 체육복 구입비를 요구해 체육진흥회 학부모들이 몇만원씩 거둬 주었으나 운동회 당일까지 교사들에게 체육복이 지급되지 않아 학부모들이 부랴부랴 돈을 다시 갹출하는 소동이 빚어졌다.
이런 식으로 빼돌려진 찬조금은 주로 「비공식 수당」으로 교사들에게 지급된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명절이나 개교기념일, 수능시험 등을 맞아 수십만원씩이 교사들에게 나뉘어 진다. 서울 강남의 H고교와 도봉의 J고교는 희망하지도 않는 학생들에게까지 적정액 이상의 보충 수업비를 받아 수업을 담당하지 않는 교장과 교감, 서무주임에게 월 35만∼40만원의 수당을 지급한 것으로 드러나 시의회의 질타를 받았다. 심지어 일부 사립학교 주변에는 『교장이 수천만원을 개인빚을 갚는데 썼다』『이사장이 새로운 사업에 투자했다』는 등의 추문이 나돌고 있다.
전용이나 횡령 의혹을 피하기 위해 처음부터 명목이 확정되지 않은 찬조금을 거두는 학교도 있다. 학부모회비, 어머니회비 등 각종 회비가 그것이다. 적립된 회비는 대표 학부모가 관리하고 학교는 수시로 이를 받아 쓴다. 이때 학교측은 교사연수비 회식비 목욕비 등 여러가지 구실을 붙이지만 이 역시 학부모들로서는 정확한 지출내역을 알기가 어렵다.<유성식 기자>유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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